Wednesday, January 29, 2014

문학 번역

번역자는 어떤 특정 문맥과 ‘울림’ resonance 가운데 텍스트의 언어를 대한다. 텍스트의 저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생존해 있더라도 창작의 생명력이 다한 저자일지 모른다.

수많은 원작 독자들이 그/녀의 작품을 읽는다. 똑같은 작품을 두고 독자마다 천차만별로 읽는다. 원작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는 그래도 최소한의 공통점이 있다.


문학 번역자는 독해와 리서치와 창의성에 근거하여 다른 언어로 새로운 본을 뜬다. 이 새로운 창작은 다시 천차만별로 읽히고 해석되면서 저자와 번역자의 의도를 벗어난다.


그렇더라도 어쨌든 번역 작품은 번역자가 내린 수많은 결정과 선택, 그리고 창조적인 노동의 결실이다.

Sunday, May 31, 2009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돌차기 놀이 (Hopscotch)>는 내가 (45세 때에) 번역에 첫발을 디디게 한 책이었고 이 번역으로 나는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번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가 그의 책을 번역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때 나는 미구엘 안젤 아스투리아스의 “바나나 3부작”으로 짬이 없었다. 코르타사르는 가보[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애칭]에게 기다리라고 했고, 그는 기다렸으며, 이 일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못 만족해했다.

그렇게 해서 <돌차기 놀이>는 내게 있어서, 水路學적인 상투적 표현으로, 분수령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이 방향을 바꾸어 그 길을 따른 까닭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없었지만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고 샘플로서 제일 첫 챕터와 뒷부분의 한 챕터 (어떤 챕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두 챕터를 번역했다. 편집자인 사라 블랙번과 훌리오, 두 사람 모두 내 번역을 좋아했고 나는 그 길로 바로 번역에 착수했다.

나와 훌리오가 이 소설에 끌렸던 것은 재즈, 유머, 자유진보주의적인 정치관, 창의적인 예술과 문학 등 그와 내가 공유했던 다채로운 관심사 때문이었다. 내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번역을 하면서야 비로소 이 소설을 완독했다.

이 특이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절차는 어찌된 것인지 이 책 자체의 특징과 부합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어떤 점에서도 번역에 지장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것이 성공적인 번역에 키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코르타사르는 그의 책을 세 편으로 나누었다. 저 쪽으로부터, “이 쪽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쪽으로부터”로 나뉘는데 마지막 편은 “없어도 좋은 챕터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는 이 소설이 여러 권의 책으로 - 무엇보다 우선 두 권으로 -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안내를 해준다.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되 제2편의 끝까지 읽고 나서는 멈추고 제3편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안내한 다음 그는 세 편의 각 챕터들을 다른 순서로 뒤섞어 배열한 안내표를 제시하여 다르게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각 챕터마다 그 끝에는 다음에 읽을 챕터의 번호가 붙어 있는 방식이다. 하지만 제일 마지막 챕터인 131번 챕터는 58번 챕터로 가라고 하는데, 이 챕터는 바로 전에 읽었던 챕터이며 131번 챕터로 가라고 한다.

이 구도는 결국 튀는 음반의 효과를 낸다. 바늘은 계속 뒤로 도로 튀고 또 이것이 반복되면서 노래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 방식에 따라 읽으면 소설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을 처음으로 대하며 정식으로 - 표면적으로는 - 읽을 경우에는 “....... 자신을 놓아 버리고, 팍, 그리고 끝.”이라는 말로 주인공 올리베이라가 창밖으로 몸을 던졌음을 암시하면서 소설은 끝나는 것 같다.

한 완고한 평론가는 그 소설을 두 번 읽도록 종용되는 것에 분노를 표했다. 훌리오는 내게 편지를 해서 그 가련한 얼간이는 자기가 우롱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에 수사학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사람들에게 그가 쓴 소설을 두 번씩은커녕 한 번이라도 읽어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라면서 절대로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번역을 완료했을 때 나는 이 책 처음의 설명이 생각났으며 내가 단순히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제일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침없이 헤치고 나옴으로써 이 소설의 세 번째 독법을 제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둔한 평론가가 깨닫지 못한 것은 <돌차기 놀이>가 하나의 게임이며 플레이할 그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훌리오가 책의 서두에 대략 제시한 설명은 두말할 것 없이 아르헨티나에서 그 놀이를 노는 방식이다.

‘땅’이라고 명명한 네모 칸에서 시작하여 숫자를 따라가다가 ‘하늘’이라고 명명한 네모 칸까지 가는 놀이이다. 훌리오의 작품을 처녀 출판해준 동향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그의 지적인 장난기를 알아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들의 가난하고 문제가 많고 종종 음울한 출생지의 역사가 좀더 그들과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코르타사르는 또한 인류는 잘못 명명되었으며 호모 루덴스로 명명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돌차기 놀이>의 번역에서 낱말을 따라가는 나의 직관적인 방법이 아주 유용했다. 여러 가지 다채로운 챕터들에 담겨 있는 흐름을 내가 그럭저럭 잡아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훌리오는 항상 각 작중 인물마다 다른 대화와 독백 방식을 부여했다.

그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와 혼잣말을 할 때 각각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음을 깊이 예리하게 인식했다. 어떤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그러한 불일치를 완전히 다른 어휘로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어미의 격 변화로 처리했다.

코르타사르를 읽을 때 독자는 그가 그런 기교를 부리는 경향이 있음을 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어떤 챕터에서는 간혹 그의 화자이기도 하고 분신이기도 한 올리베이라로 하여금 그가 라 마가의 방에서 집어 든 책 한 권을 보게 한다.

첫 번째 줄은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줄거리가 되는 시대와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줄, “그리고 그녀가 읽는 것들은, 서투른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코르타사르가 주인공 올리베이라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그가 작중에서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을 한 줄씩 번갈아 가면서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올리베이라가 사용하는 말이 갈도스의 말에, 또 그 역으로도, 영향을 주지 않도록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다뤄야했다.

이 혼합은 여러 번 유네스코의 공문서와 같은 것들이 포함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코르타사르는 유네스코에서 번역가로 일했던 적이 있다. 이 사실 때문에 번역에 정통한 사람의 면밀한 검사에 놓이게 된다는 불안감으로 떨기보다 나는 오히려 내가 어떤 어려운 일에 직면하여 있는지 훌리오도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미상불 그는 경우에 따라서 오직 번역가만이 해줄 수 있는 제안을 해주곤 했다. 따라서 그가 소설에 양념으로 사용한 공문서 부분의 번역에 이르렀을 때, 나도 그가 먹고 살기 위해서 했던 일을 그대로 하게 되었다. 즉, 보고서들을 충실하게 번역하되 그것들이 서로 좀 일치되도록 손을 보려는 유혹을 물리치며 번역을 한 것이다.

<돌차기 놀이>의 첫 부분과 “없어도 좋은 챕터들”의 일부분,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서술 에서 불어가 상당히 많이 엮어져 있다. 이 부분의 불어를 영어로 번역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훌리오가 그 부분들이 영어로 번역되기를 원했다면 소설을 쓸 때 처음부터 그 부분들을 불어가 아닌 서반아어로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영어권 독자들을 위하여 그 책을 쉽게 씀으로써 그들을 모욕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나는 어떤 경우에는 다른 여러 이유 때문에 서반아어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표기했다. 다른 노래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탱고는 오리지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 때로는 정말 웃기는 - 손상이 가해지기도 한다. 오페라 애호가인 나의 아버지가 오리지널인 이탈리아어 대신 영어로 바꾸어 부른 어떤 공연에서 들은 어떤 敍唱 부분을 인용하면서 오페라 번역이라는 어리석음을 놓고 조용히 웃으시던 일이 기억난다.

(. . .)

나의 첫 번역이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작품이었으며, 이것을 번역하게 됨으로써 나는 그 다음에 번역하게 될 다른 작품들을 번역하기에 적절한 마음가짐과 방식에 연동하게 되었다. (. . .) 하이드 씨가 지킬 박사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닮아가기 시작했지만 그림자만을 투영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의 언어로 움직였기 때문에 둘이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훌리오보다 먼저 <돌차기 놀이>를 생각하게 되었어도 그 작품을 쓸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훌리오가 승인하고 좋아한 영어 번역으로 그 작품을 살려냈다. 이제 90세를 바라보는 인생을 살아오며 낱말들이 시들어가고 또 다시 희미하게 빛을 발하면서 새로운 의미와 뉘앙스를 띠게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래의 언젠가 다른 누가 내 뒤를 밟으며 훌리오의 작품을 다시 번역해낼까 하는 자문을 해본다. 이 일은 끝없이 계속 진행될 수 있다.

왜냐하면 번역이란 절대로 완료되는 법이 없는 야릇한 점진적이고 진행형적인 문예상의 장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Trans. Gene

Monday, March 30, 2009

Text (1)

의도적으로 비非텍스트non-text를 창작에 사용하는 시인이나 산문 작가들의 작품은 차치하고, 실제 생활에서 비텍스트에 가장 근접한 것은 어린아이의 말과 좋지 않은 번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 Halliday and Hasan in Mona Baker, In Other Words (Routeledge, 1992), p. 111
Trans. Gene

Monday, March 16, 2009

문예 번역 (8)

번역을 수용하는 문화에 응하기 위해 번역을 수정하는 의식적 수정 결정이 뒤따를 수 있다. 이것은 편집자와 번역자의 공동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작 내용의 일부를 빼는 수도 있다.

많은 출판사들이 원작 언어를 아는 편집자를 고용하지 않는 것도 지적해둘 만하다. 원작의 영향을 받지 않고 편집에 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번역은 상당한 창의력을 요하는 노력의 결실이다. 번역자는 번역이라는 내성적 활동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서로 얽힌 사회적, 문화적 요소와 관련하여 그 어떤 제약이 있더라도 기존 문학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결국 문예 번역자인 것이다. (피터 부시)

- 이상 Routledge Encyclopedia of Translation Studies (2008: 127-130) 에서 추려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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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March 15, 2009

문예 번역 (7)

텍스트의 종류에 따라 다른 번역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단시短詩를 번역할 때와 장편 소설을 번역할 때의 접근 방법이 같을 수 없다. 소설을 번역할 때는 수 백 페이지에 이를 수 있는 작품의 전개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다른 운율, 비유, 상징을 다루어야 한다. 다독과 리서치를 통해 그런 것들의 유형을 식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들은 창의적으로 고쳐 쓰는 과정에 예속되어 잠재의식에 의해 번역에 반영되기도 한다.

모호한 표현과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로 가득한 제임스 조이스의 촘촘한 텍스트를 번역할 때는 조이스가 자국의 표준 언어와 기존 관념을 뒤흔들었듯이 번역어의 문화를 뒤흔들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문예 번역은 사회와 문화에 얽힌 작업이며 번역자는 상이한 두 문화의 중간에 위치하며 이곳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상호 작용에 열쇠의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는 벤야민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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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rch 14, 2009

문예 번역 (6)

텍스트를 세심하게 읽고 또 읽으면서 해당 텍스트에 대한 리서치와 저자의 다른 작품에 대한 리서치를 하는 것은 번역에 필수적인 준비 작업이다. 저자가 사는 나라에 가보는 것도 있을 수 있겠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리서치도 있을 수 있다 [-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특히 한국의 경우, 비현실적일 것이다.]

자국의 저자가 쓴 책 가운데 그와 비슷한 책이 있으면 참고로 읽어보는 것도 좋다. 번역가 펠스티너의 경우,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번역하는 데에 적절한 ‘목소리’를 가늠하기 위해 T. S. 엘리엇의 시를 읽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어느 기사에선가 읽었는데, 전문 번역가 정영목 씨가 한국 문학 작품을 읽어 한글 표현력을 키운다고 했던 것 같다.]

생존해 있는 저자의 작품을 번역할 경우, 저자와 번역자가 협력해서 번역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어떤 저자들은 기꺼이 번역에 적극 관여하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번역의 결과는 원작과 다른 새로운 작품이 되기도 한다. 원작에 새로운 것이 보태지는 것이다. 한편 어떤 저자들은 번역 텍스트에 코멘트를 하는 정도에 그친다.

또 한편 번역자 편에서 원저자의 관여에 일정한 선을 긋기도 한다. 원작에 너무 단단히 얽매이지 않는 번역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이런 방식은 번역자의 재량에 폭을 더해준다(Venuti). 번역할 작품에 대한 학문적인 리서치를 안 하기로 결정하는 번역자들도 있다. 좀더 창의적이고 직관적인 번역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번역 방법을 선택하든지 번역은 기본적으로 다독과 개고의 결과다. 다독과 개고는 최종 원고의 모양을 결정한다. 배경은 매우 중요하다. 번역, 출간의 전반적인 과정은 외부적인 요소들에 의해 끊기거나 변경될 수 있다. 어떤 책의 출간일은 영화의 개봉에 맞춰야 할 것이고 [또 어떤 책은] 경제나 정치 상황에 민감하게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Wednesday, March 11, 2009

문예 번역 (4)

(내가 완전히 전업 번역자가 아닌데 이런 글을 계속하려니 다소 낯간지럽다. 그러나 어쨌든 번역은 멋진 일이며, 심지어는 예술의 묘미마저 느낄 수 있는 분야임을 알기 때문에 기왕 하는 것 깊게 파고 싶은 마음이다. 번역이 순수한 창작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독서에 있다. 번역은 정밀 독서의 정화다. 결정체다. 다른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바로 번역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러한 측면 말고도 학문적인 측면에서 아직 개간해야 할 곳이 많으므로 또한 매력적이지만 여기에 모든 시간을 쏟을 수 없는 나로서는 좀 아쉬울 따름이다. 아무튼 이 블로그는 그냥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Motivation, 그렇다. 번역을 계속해야 하고 또 이런 블로그를 계속해야지, 동기 부여를 찾아야 한다. 어디서 찾지?)

나라별로 번역과 번역자가 처한 상황이 다를 것이다. 프랑스의 출판사 Actes-Sud 의 한 자회사는 일단의 문예 번역자들이 운영하며 번역서를 선정하고 외부 번역자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일을 총괄적으로 관장한다. 또한 외부 평가자들을 두고 번역 고려 대상 도서들에 대한 소견서를 의뢰하고 수집한다. 영국과 미국의 경우, 출판사들은 대개 프리랜스 번역자들에게 번역을 의뢰한다. 이 번역자들은 출판사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아는 사람을 통해 (누구의 친구가 번역을 하는데 괜찮게 한다더라 하는 식으로) 소개를 받아 일을 맡기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된 작품을 보고, 혹은 번역자 인명부를 찾아 의뢰를 한다.

번역자마다 번역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같은 번역자라도 번역하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현존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든 기존 번역본을 디딤돌로 삼아 고전을 재번역하든 번역자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단계와 문제점들이 있다. 과거에는 번역자들이 이런 단계와 문제점들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고 조지 스타이너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제는 번역자들이 그런 점들에 대한 많은 사례 연구를 남기고 있다.

(한국의 번역자들도 사례를 글로 남기는 일에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특히 번역 역사가 일천하고 지반이 약한 한국의 번역을 볼 때, 기록을 남기는 일에 정말 열심을 부려야 할 것이다. 그저 일반적인 이론서만 대충 어디서 뱉기거나 짜깁기해서 내지 말고, 직접 번역해가며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구체적인 사례로 많이 남기고 후학들이 이것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문학 번역서들을 보면―인문서 번역도 그렇지만―S대 영어 박사라고 혹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교편을 잡고 번역한다는 사람들의 번역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번역이 무성하다. 학생들에게 돈벌이를 시켜주기 위해 대신 하게 한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인문서의 경우는 내용의 효과적인 전달 내지는 작가의 문체 논의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문법과 어의 등 기초적인 문제에 대한 오역 시비나 거론되고 있느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Tuesday, March 10, 2009

문예 번역 (3)

문학 번역자는 출판계 내의 사회적 관행과 현금적인 측면의 관계 연쇄에 속해 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받을 금액에 동의하고, 번역 저작권과 원고 마감일 등에 대한 협약을 해야 한다. 에이전트가 있는 원저자들과는 달리, 번역자들은 모두 단독으로 출판사와 협상을 한다. (한국의 경우는 원저자들도 에이전트가 없겠지만. 또 이하 한국의 경우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번역료는 인세에 대한 선급금의 형태로 일부 먼저 지급되기도 한다. 원저자와 번역자의 인세 비율은 5:5, 6:4, 6:6 등으로 책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번역자에게 지불되는 돈을 추가 비용이라고 보는 인색한 출판사는 인세에 대해 지불하는 선급금의 금액이 적거나 번역 인세를 적용하지 않고 글자 수(외국의 경우 1천자 당 얼마, 한국의 경우 원고지 매절 수당 얼마)를 계산하여 지불한다. 많은 번역자들은 출판사와 협의를 할 때 원고 분량에 따른 지불 방식보다 번역에 걸리는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애를 쓴다. 문학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이나 사단법인들의 문화 진흥 기금이 특정 출판사들에게 지급되기도 하는데 이런 돈은 출판사가 번역자를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정은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의 출판사들은 번역의 진흥을 위해 정부나 기업체 등의 문화 관련 조성기금을 얻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Monday, March 9, 2009

문예 번역 (2)

문학 번역자의 한 모델 - 두 나라 말을 하고 두 나라 문화에 침투해 있다. 따라서 통상적인 지도책에 나와 있지 않은 지역에 거한다. 그/녀는 부단히 변하는 동시대 문화 현실에 정통하다. 이 현실에서는 인위적인 정치적 경계선을 넘나드는 이동이 끊이지 않는다. 단일 언어문화라고 자임하는 앵글로색슨계의 사회체제에서 그런 부단한 변화와 이동은, 병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위협적인 상황으로 비친다. 문학 번역자들은 상이한 문화가 만나는 첨예한 지점에 위치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번역하기로 선정된 작품들, 선정되지 않았더라면 그 존재를 알지도 못할 작품들을 번역하기 때문이다. 흔히 번역자들은 번역할 작품들을 제시하거나 혹은 정기적으로 해외의 출판사들이나 에이전시가 자국의 출판사에 보내온 작품들을 대신 읽고 이에 대한 소견서를 쓰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해서 내리는 선택과 결정은 선정된 원작이 탄생한 문화에서 쓰이는 언어와 정서 특유의 진수임을 알리는 행위다. 선정된 원작이 전통적인 기준에서 벗어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또한 그것은 선정된 작품이 번역되었을 때 시장성이 있음을 믿는 행위다. 그렇지만 어떤 문학 번역이든 민족주의적 규범을 깨기 마련이며 이것은 당연지사다. 번역 작품이 제아무리 번역 작업과 출판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국에 흡수될지라도, 번역은 원작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독자들의 독서 공간에, 번역되지 않았더라면 한낮 의미 없는 암호에 불과했을 작품을 독자가 읽어 알 수 있도록 소개하기 때문이다. 문학 번역자는 자국 문화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작품의 창조자로서 언어와 문화의 변경에서 일한다. 이 변경에서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미국인”, “한국인”, “흑인”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꼬리표로 축소되지 않는다.

Sunday, March 8, 2009

문예 번역 (1)

문학 번역은 문학 번역자들이 하는 일이다. 하나마다 한 자명한 말이지만 문학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의 일환에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번역은 사회와 문화 관습의 복잡한 망상조직의 중심에 있는 독창적인 주관적 활동이다. 번역자의 창의적이고 이지적이며 직관적인 글쓰기가 흔히 ‘번역’이라고 표현되는 껍데기뿐인 추상 개념에 묻혀서는 안 된다.

문학 번역자들은 문학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기성 체계와 야합하든지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 대개 시, 희곡, 산문과 같은 순서로 얘기되는 ‘고高’ 문화가 있고 이와 반대편 ‘낮은’ 부문에서는 공상 과학 소설, 아동 소설, 통속 소설 순으로 내려간다. 이 같은 위계는 번역할 작품의 상대적인 가치와 난이도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에 반영된다. 그러한 분류는 문화 이론가들, 탈근대주의자들, 그리고 일부 번역학자들에게 비난을 받아왔다. 그들은 규범의 구성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사회계급, 성별, 국가, 그리고 인종의 편견을 통해 굴절된 가치 판단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지 지적해왔다. 이런 비난들은 작가들이 다양한 독자들의 다양한 독서에 이익이 되기 위해 무엇을 썼는지에 대해 평가를 할 때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왕 같은, 혹은 여왕 같은 저자들은 분산된 개별적인 독자층에 의해 폐위되고 다른 사람들로 대체되어왔다. 문학 번역자들의 일은 은연중에, 그리고 때론 노골적으로 그 규범의 권위, 문화의 국수주의, 저자들의 ‘죽음’에 이의를 제기한다.

(피터 부시)

Wednesday, March 4, 2009

월요일에 으스스 한기를 느끼면서 급기야 지독한 감기에 걸려 어제부터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음. 겨우내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나오다가 봄의 문턱에서 그만 단단히 고생하는데 자칫 원고 약속 날짜를 어기게 될지도 . . .

Thursday, February 26, 2009

문화의 차이에 따른 연어 관계의 변화

간혹 어떤 번역자들은 때론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의미의 정확함 혹은 번역자 자신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선택해서 번역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코 원작 텍스트에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재생해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느끼는 번역자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원작 텍스트:

KOLESTRAL-SUPER is ideal for all kinds of hair, especially for damaged, dry and brittle hair.

역逆번역 (위의 텍스트에 대한 아랍어 번역을 다시 영어로 옮김):
Kolestral-super is ideal for all kinds of hair, especially for the split-ends hair, harmed or damaged hair and also for hair which is dry, of weak structure or liable to breaking.

영어에서 hair 와 연어를 이루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dry, oily, damaged, permed, fine, flyaway, brittle 등등. 이들 연어들은 영어권 나라의 문화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말들이다. 대다수 영어권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가벼우며 잘 손상되는 축이다. 아랍어에서 ‘split-ends’, ‘dry’, ‘oily’, ‘coarse’, ‘smooth’ 등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 ‘hair’ 와 연어를 이룬다. 이 연어 관계는 아랍어권의 문화적인 현실을 반영한다. 아랍어에는 ‘damaged hair’‘brittle hair’ 와 유사한 구절이 없다. 그럼에도 위에 든 예문의 번역자는 원작 텍스트에 담겨 있는 의미의 모든 양상을 그대로 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원작 텍스트의 연어 구절들이 그대로 아랍어로 옮겨졌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번역을 했다. 아랍어 번역에서 표현된 부자연스러운 연어 구절과 길어진 설명은 아랍어 독자들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말들이다. 게다가 ‘damaged hair’‘brittle hair’ 같은 말들이 아랍의 일반인들에게 문제로서 비춰지는지도 의문이다. (Baker, 1992: 61)

그렇다면 예문의 광고 문안은 Kolestral-super is ideal for all kinds of hair, especially for the dry, split-ends hair. 정도로 번역되었으면 족하다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이것이 아랍인들에게 두발의 문제라고 인식되어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이 광고 문안이 설명하는 제품은 아예 처음부터 아랍인의 두발 미용과는 상관이 없든지, 있더라고 광고문안이 새로이 작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부터는 번역자의 소관을 넘어서는 문제일 것이다.

같은 예문을 한글로 번역한다면 콜레스트랄 수퍼는 모든 유형의 머리카락에 이상적이며 손상된 머리카락에 특히 좋습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머리카락은 굵어서 파마로 인해서 손상되거나 기름기가 빠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 손상되지 않는다. 백인의 머리카락은 대개 건조하고 가늘고 가벼워서 풀풀 날리며 동양인이나 흑인의 머리카락보다 잘 손상되는 축에 속한다.

번역을 함에 있어서 문화적인 차이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언어의 표면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임할 경우, 번역어 독자에게 생경하고 잘 와닿지 않는 번역이 될 소지가 많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문이다. 언어 외적인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에 관한 지식, 다루어지는 주제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Wednesday, February 25, 2009

정확함과 자연스러움 사이의 갈등 (2)

앞선 포스트에 대한 예를 하나 살펴보겠다. 정확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선택한 번역에 관한 것이다. 추가 설명을 보탬으로써 텍스트가 어수선하게 되거나 혹은 어색한 연어구를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만큼 의미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경우다.

원작 텍스트:
New Tradition offers a fascinating series of traditional patterns in miniature using rich jewel-like colours that glow against dark backgrounds.
(뉴 트러디션은 어두운 배경에서 빛을 발하는 선명한 보석 색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문양의 매혹적인 축소판 시리즈를 내어놓습니다.)

역逆번역 (위의 텍스트에 대한 아랍어 번역을 다시 영어로 옮김):
The ‘New Tradition’ collection presents a number of fascinating designs in a reduced size, in dazzling colours like the colours of gems, the glowing of which is enhanced by the dark backgrounds.
(뉴 트러디션 컬렉션은 다수의 매혹적인 디자인의 축소판을 보석 색 같은 눈부신 색상으로 선보입니다. 이 색상은 어두운 배경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Rich colours 는 선명하고 짙다. 아랍어의 연어 구절은 색의 농도보다는 밝은 정도를 나타낸다. (Baker, 1992: 57)

원작 텍스트에서 연어 관계를 이루는 구절에 대응하는 구절을 번역 텍스트에서 찾을 수 없을 때 내려야 하는 선택이다. 번역 텍스트가 쓸데없이 길어지거나 어수선하게 되더라도 설명하는 식의 번역을 해서 정확성에 치중할 것인지, 아니면 해당 구절의 의미를 충분히 살려주는 것이 문맥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으므로 번역어에 자연스러운 구절로 의미의 일부만 살려서 간결하게 처리해줄 것인지 판단해서 내릴 선택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내린 선택의 결과를 두고 부실 번역이나 오역 시비를 거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Monday, February 23, 2009

정확함과 자연스러움 사이의 갈등 (1)

(지리멸렬한 세태! 실패를 하더라도 좀더 폼나게 실패하기 위하여 오늘도 . . .
I will ever try. I may fail again. But I will fail better.)

번역자라면 누구든 번역을 할 때 원작 텍스트의 연어 관계를 깨지 않으면서 그 의미를 살리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 의미를 십분 살려 놓지는 못한다. 그 의미의 차이는 주어진 문맥 속에서 볼 때 아주 미세할 수도 있지만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영어의 ‘a good/bad law’ 는 보통 ‘a just/unjust law’ 로 번역된다. 이 의미의 차이가 중요하고 안 하고는, 주어진 텍스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이 ‘공정’에 초점을 두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또 한 예로 영어의 ‘hard drink’를 아랍어로 번역할 때 아랍어의 가장 가까운 말은 ‘alcoholic drinks’ 라는 연어를 이루는 말이다. 그런데 영어에서 ‘hard drink’는 위스키나 진과 같은 독한 술을 의미하며 맥주나 셰리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랍어에서 ‘alcoholic drinks’ 는 독한 술은 물론이고 맥주나 셰리 등 알코올을 함유하는 모든 음료를 가리킨다. 아랍어에서는 영어의 ‘hard drink’ 와 대등한 연어구連語句가 없다. 번역자가 ‘hard drink’를 전형적인 아랍어의 연어구로 옮기거나 혹은 그 의미를 분명히 살리기 위해서 연어 관계에 있지 않은 말을 사용하여 풀어서 번역한다든지 하는 결정은 원작 텍스트의 문맥에서 ‘hard drink’ 와 ‘soft drink’ 의 구분이 중요한지 아닌지 혹은 문맥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다.

어느 정도의 의미의 상실이나 보탬이 불가피한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언어마다 서로 구성 체계가 다른 까닭이다.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좀 달라질 경우, 이것을 받아들이고 말고의 여부는, 이 변화가 주어진 문맥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Baker, 1992: 56-57)

관련 언어에 대한 이해가 번역에 필수적인 전제 조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번역이론에 대한 개관과 이해도 균형 잡힌 번역을 위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도구다.

Saturday, February 21, 2009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 Samuel Beckett

Friday, February 20, 2009

그레고리 라밧사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번역자들에게 그가 한 말을 옮기지 말고, 그가 전달하고자 한 것을 옮기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이런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생각해볼 점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이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A drum! a drum! Macbeth doth come.

그런데 이 우렁찬 외침이 불어 번역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힘없이비실거린다.
Un tambour! un tambour! Macbeth vient.

번역자는 이런 부분에서는 이 부분에서 재량이나 창의성을 발휘했어야 했다. 셰익스피어가 전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그 정신을 살려주도록 말이다.

보르헤스가 한 말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점도 또한 생각해볼 수 있다. 베를렌이 바이올린의 구슬픈 소리를 모방해서 “Les sanglots longs des violons de l'automne."라는 문장을 썼다. 이 문장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비음을 가진 말이 - 트롬본 소리라면 모를까 - 영어에는 없다. 그럼 번역에서 악기 자체를 트롬본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이 편이 번역의 본질에 더 합당한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Sunday, February 15, 2009

그레고리 라밧사 (2)

독자의 경험은 독서에 영향을 미친다. 독자로서의 번역자도 예외일 수 없다. 사람들마다 모두 사람들은 저마다 특별히 좋아하는 말이 있다. 경험이나 환경, 환경이 서로 다르고 혹은 교육을 통한 선호가 또 교육의 영향으로 선호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 많이 사용된 특정한 낱말이나 표현을 표현이 너무 많이 쓰여서 고쳐 써야 할 때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어떤 분위기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내 자신의 경우, 월요일에 사용한 단어를 화요일에 다시 보고 마음에 안 들어 다른 단어로 바꾸었다가 수요일에 다시 원래 선택했던 단어로 되돌려놓기도 한다.

이 끊임없는 바꿈은 변경은 처녀귀신처럼 번역자들을 번역자에게 처녀귀신처럼 따라다닌다. 들러붙는다. 내 생각에 완성된 번역이란 없다. 일단 매듭지어 놓은 번역은 폐쇄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어 끊임없이 개고될 수 있다. 번역에 선택된 언어는 원저자의 언어만큼 확고하지 않은 까닭이다. 번역자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자는 자신이 선택한 번역어가 가장 좋은 선택인지 100%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번역해서 출간된 근사한 책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괴로운 심정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표지를 보면 마음이 흡족하지만 책을 펴서 읽어보면 첫 페이지부터 갈등이 일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번역하지 않고 저렇게 번역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갈등이다. 나는 내가 번역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지 않는다. 첫 페이지부터 그런 갈등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읽으면 너무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을지라도 내가 선택한 어휘나 표현에 대해 내 스스로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한 어휘나 표현 등이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느냐는 의문은 없어지지 않는다. 원작은 영원히 영광 속에 행진을 계속하지만 오래된 번역서는 자꾸 새롭게 번역해야 하는 번역되어야 할 필요가 바로 그런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Thursday, February 12, 2009

그레고리 라밧사 (1)

(그레고리 라밧사 Gregory Rabassa 의 이야기 중에서 생각해볼만한 부분들을 발췌해본다. 라밧사는 마르케즈의 Cien años de soledad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를 영역한 장본인으로 영어권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저명한 번역가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두고 마르케즈가 자신의 원작보다 마르케즈는 영어 번역 작품이 번역이 자신의 스페인어 원작보다 더 훌륭하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라밧사는 컬럼비아 대학 Columbia University 과 뉴욕 시립대학 CUNY, Queens College 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에 라밧사의 ‘백년 동안의 고독’ 번역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라밧사는 1970년 ‘백년 동안의 고독’에 대한 번역료를 인세로 받지 않고 글자 수(매절)로 받았다. 영역본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판매량은 극히 저조했다. 그런데 그러나 마르케즈가 1982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고 이 책의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급증하자 급증했으며 이로 인해 약간 배가 아팠었다는 얘기를 그의 라밧사의 회고록에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는 글은 그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글이 아니다. 회고록 If This Be Treason (2005) 에 나오는 글이 아니고 The Craft of Translation (1989) 에 나오는 글이다. 시간이 날 때 여기저기 흥미로운 부분만 조금씩 이 자리에 옮겨보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이 세상에 서로 똑같은 것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희망사항이고 희망사항일 뿐이고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산수교육 탓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엄격하게 엄밀하게 비교하고 따져보면 모든 것은, 생물이든 아니든 간에, 서로 아주 많이 닮았을지라도 개별적으로 철저하게 독특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알파벳의 첫 글자를 배우고 덧셈을 배우기 시작했고, 셈하는 것, 즉 2 +2 = 4 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고부터 줄곧 그와 같은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 셈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한다. 2 + 2에서 두 번째 2가 첫 번째 2보다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새롭기 때문에 2 + 2 = 4 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언어를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한 언어에 속한 단어가 다른 언어에서 등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실제로 요즘의 수학자들은 그들의 선배들보다 좀더 신중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취한다. ‘동일하다’라는 말 대신에 ‘접근한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빈번해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번역은 원작과 동일할 수 없고, 다만 원작에 접근할 뿐이다. 그리고 정확성과 관련하여, 번역의 우수성은 그 번역이 원작에 얼마나 가깝게 접근하고 있느냐에 의해 평가될 수밖에 없다.

Sunday, February 8,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5)

원저자가 이미 저세상 사람일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난센스 같은 글을 썼을 때는 번역 출판사의 질문들을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뉴욕의 한 출판사와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의 시선詩選을 번역했던 적이 있다. 그 출판사의 편집실에서 당황해 하며 내게 코멘트를 보내왔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요.’
‘그래요 말이 안 되죠. 모르겐슈타인은 난센스의 시인이었어요. 루이스 캐롤이나 에드워드 리어를 생각해보세요.’

나는 싱글 스페이스로 장장 5페이지에 걸친 편지로 - 번역된 전체 시보다 훨씬 더 길게 -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여전히 걱정하는 질문을 해왔다.

‘영어에는 이런 단어가 없는데요.’
‘맞아요, 없죠. 하지만 독어 원작의 이 단어는 독어에도 없는 단어예요.’

나는 모르겐슈타인에게 지원 사격을 청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했을 것이다. (모르겐슈타인은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매우 유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저세상 사람이니 그가 내 번역을 승인하겠지 하고 바랄밖에.

Friday, February 6, 2009

한국문학 번역의 과제들

이 블로그에서 신문 기사나 남의 글은 스크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이 기사만큼은 나중에 잊지 않고 다시 보기 위해 여기에 담아둠.

안선재(Brother Anthony) | 한국문학 번역가, 서강대 명예교수

한국인들은 흔히 한국문학이 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 출간된 작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1년 이후에 70편이 넘는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작품 수는 분명히 그보다 더 많다. 자주 듣는 또다른 말은, 한국문학의 번역은 형편없어서 노벨문학상 같은 것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첫번째 답변은, 최근에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있다는 것이다. 번역과 성공적인 마케팅은 노벨상을 타는 선행조건이 아니다. 두번째 답변은 지난 10년간 내가 봐온 한국문학 번역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충분히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상당히 괜찮다는 것이다. 세번째 답변은 노벨상 수여기관인 스웨덴 왕립아카데미 회원들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씌어진 문학작품을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명백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그들이 내린 판단은 대부분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동상이몽

그러나 한국문학의 번역과 홍보가 당면한 문제는 분명히 있다. 첫째, 번역될 작품을 선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의 문화, 정부 관계자들은 대개 이미지 선전으로써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려는 총제적인 캠페인의 일환으로, 널리 상찬되고 정평있는 '유명한' 한국작가들의 번역을 추진하려고 한다. 한국문학사를 가르치는 학계의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판단하기에 근대 한국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작품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늘날 해외의 상업출판업자들의 관심은 단 한가지에 집중된다. 즉 그들은 재정적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자기들의 위신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팔리는 작품을 출판하려고 한다. 한국측의 '문헌적 정보' 프로젝트와 '성공・수익'에 대한 외국 출판업자들의 요구 사이에는 직접적인 갈등이 있는데, 이 갈등은 런던이나 빠리, 뉴델리 등지에서 현재 어떤 종류의 문학작품이 잘 팔리는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문학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므로 전세계가 그 한국 작품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일은 없다. 최근에 나는 한 유명한 한국작가가 너무 많은 젊은 한국작가들이 1인칭 화자를 도입해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사실적인’ 스타일로 창작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세계문학으로 진출하려면 국제감각부터 익혀야

그의 비판은 (나는 그 논평의 전문을 보지 못했지만) 많은 한국문학 작품에서 서술자의 복합성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많은 한국 소설은 시작에서 출발해 간혹 회상이 섞여 들어가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어색한 결말로 끝맺는다. 외국의 성공적인 소설은 이렇게 창작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문학을 '세계화'하기를 바랄 때 한국이 당면한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오늘날 세계의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국 작가들과 독자에게 교육하는 것이다. 현재 번역과 출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 문학작품을 바깥에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동시대 외국의 탁월한 작가들을 한국독자에게 알리는 일이다. 전해지는 근래의 일본소설의 성공담은 그 점을 확인해준다.

많은 기성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을 현대인의 시청각매체에 대한 집착 탓으로 손쉽게 돌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독자들이 뭔가 더 나은, 진정으로 새롭고 즐거운, (최소한 때때로) 생각을 자극하는 그런 작품을 원한다는 사실의 징표이기도 하다. 양질의 현대 세계문학의 번역을 한국의 출판인들이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에 해가 되는 일이다.

외국독자들이 말하는 한국의 시와 소설

오늘날 세계에서 시는 대부분 잘 팔리지 않는다. 상을 타고 비평의 주목을 받으면서 수익을 내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시가 지난 20년간 한국소설보다 영어로 그렇게나 많이 출간되었는가? 나 자신만 해도 시집을 거의 20여권을 번역했지만 번역한 소설은 3권에 불과하다.

이 물음에 대한 한가지 답변은, 한국 시는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고 활기차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 시인들은 번역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특정한 한국적 삶의 경험에 대해 쓴다. 그들의 시는 살아 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독특하게 인간적이다. 물론 그 시적 효과를 위해 주로 한국어의 특징에 의존하는 시인들은 번역으로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외국독자들에게 어떤 한국 시들의 영향은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으레 이렇게 묻는다. "작품이 왜 이렇게 우울한가?" 시는 자주 고통스러운 상황에 복합적이며 개인적인 반응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목소리를 듣게 한다. 물론 소설은 시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한국 소설가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아한 문체, 다양한 서술 리듬, 해석의 모호함, 여러 서술자들의 목소리, 글쓰기 전략에서의 복합성 등은 모두 시로서의 소설이 갖는 근본적인 특성들인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체면치레하지 말고 치열하게 비판하라

물론 어느 면에서는 한국작가들이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효과적인 대화가 성숙되지 않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어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탓도 있다. 서평 형식으로 (때로는 맹렬하게) 표현되는 문학비평은 국제적인 문학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모든 작가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자기에게 너그러운 것이다. 사려깊고 도전적인 비평 없이 어떤 작가가 기량을 연마하고 약점을 고치고 성숙한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할 수 있겠는가? '체면'과 '명성'이 핵심 고려사항인 한국 같은 문화에서 정직한 비평은 자주 거부된다. 이건 큰일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창작되는 작품과의(반드시 북미나 유럽의 작품일 필요는 없다)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이 다시 태어나려면, 문단이나 학계의 '고참'들이 젊은 작가에 대해 후견인 노릇을 하고 평가하는 여전히 강력한 위계구조는 철폐하고,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자유를 찾아야만 한다. 그런 새로운 한국문학이라면 번역될 때 찬사를 받을 가능성이 휠씬 크다. 또한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핵심적인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7.5.15 ⓒ 안선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