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12, 2009

텍스트의 어휘 결속

번역비평 (4)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번역이론과 관련해서 비공개 블로그인 The Presence: Translator's Note 에서 포스트한 것 중의 하나를 이 블로그에 옮긴다. 텍스트 분석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항 중의 하나다. 먼저 현재 번역하고 있는 책에서 예문을 따온다.

So we trek around the corner from our houses to Sam's, the local brashly lit fish and chip shop. Jeremy tells me how one of his authors, Maureen Lipman, mourns for her husband, Jack Rosenthal. 'She makes herself frantically busy, acting and singing strenuously in a play in the West End, writing a column for the Guardian, rushing here, doing that, speaking at charity functions, etc.' Jeremy knows that since the accident, for the most part I rarely venture further than Hampstead and am now too inactive. At present, often, I sit and do not even stare. I tell Jeremy about my Uncle Isidore who when asked, 'What do you do?' replied truthfully, 'Nothing. And I don't do that until after lunch.'

결국 제러미와 나는 길모퉁이를 돌아서 있는 샘스로 힘든 발걸음을 옮긴다. 실내조명이 너무 밝은 동네 생선 튀김집이다. 모린 리프만이 어떤 식으로 남편 잭 로젠설의 죽음을 어찌나 슬퍼하는지 애통해하는지 모른다는 제러미의 말이다. 제러미가 내게 말해준다. 제러미가 하는 출판사는 모린 리프만의 책을 낸다. "모린은 자초해서 자신을 미친 듯 바쁘게 살아요. 바쁘게 몰아쳐요. 웨스트엔드의 어느 연극에 출연해서 힘겹게 정력적으로 필사적으로 연기와 노래를 하고 '가디언'지에 칼럼을 쓰기도 해요. 급히 서둘러 이동하는가 하면 항상 무언가 하죠. 또 자선 행사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를 해요." 제러미는 안다. 대체적으로, 내가 사고를 당한 뒤로는 무거운 마음을 무릅쓰면서까지 햄프스테드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고 또 활동량이 부족하다는 무기력하다는 것을. 요즘 보통 나는 앉아 있어도 무언가를 응시하는 가만히 바라보는 일도 없다. 제러미에게 내 숙부님 얘기를 해준다. 이시도 숙부님은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점심시간 전까지는 그것도 안 해."라고 하셨다. 그야말로 진실한 대답이었다.


개별적인 어구는 다른 어구와 함께 텍스트에서 만나는 관계망에 의해서 그 의미가 주어진다는 개념은 전체적으로는 언어학의 통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지엽적으로는 번역학의 통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넬혼비는 번역학에서 이 통칙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주어진 번역가는 주어진 텍스트를 분석할 때 이 텍스트에서 현상이나 세목을 분리해내어 깊이 고찰하는 일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관여하지 않고 관계망의 추적에 관여하는 것이 번역가의 일이라고 관여한다고 한다. (Baker, 1992: 206)

텍스트의 관계망은 텍스트를 결속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 텍스에서 발생하는 개별적 어구의 의미를 규정한다. 사용되는 어구가 텍스트 내에 불러들여지기 전에 지니는 명제적인 의미를 십분 이해해야 함을 전제로 하는 얘기다. 관계망의 결속은 텍스트의 짜임새를 결정한다. 번역할 텍스트를 대했을 때 이 관계망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지만 어느 정도 원본 텍스트의 관계망에 의해 전달되는 전체 텍스트의 '결'을 어느 정도나마 옮겨주는 번역을 기대할 수 있음이다. 이런 점을 충분히 인식한 다음 다음에 텍스트에서 그것을 파악하지 않고 파악하고 나서 번역할 번역해야 하는데 경우 그렇지 않을 경우 , 그 텍스트가 텍스트의 정교하게 짜인 그물 구조가 흩어지게 되어 원본과는 거리가 먼 산만한 번역본이 되기 쉬울 것이다.

텍스트의 결속을 이루어주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에 주어진 본문에서는 어휘로 이루어지는 결속 lexical cohesion 중에서도 연어로 이루어지는 결속이 중요하다.

위의 본문에서 trek, mourn, frantically, busy, strenuously, rushing, venture 가 한 그룹을 이루고 inactive, sit, stare, nothing 이 다른 한 그룹을 이루어 서로 대조를 이룬다.

trek, venture, busy, frantically, strenuously, rushing 등은 함께 쓰이는 빈도수로 연어를 이루며 서로 쉽게 연상되는 어휘다. 이 어휘가 한 텍스트 안에서 서로 가까운 곳에서 쓰이며 서로 협조 관계를 이루면서 문맥을 결속시킨다. 다른 어휘 그룹도 마찬가지다. 번역을 하면서 이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한글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서로 관계망을 이룰 수 있는 어구를 찾아 그 결속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 위의 초고를 수정해보도록 하겠다.

(01-13-09): trek 에 관해서는 1월4일 포스트에서 생각해보았으므로 생략하고 나머지 어휘 lexical item 를 생각해보겠다.

위에 열거한 일련의 어휘가 서로 체인을 이루며 모린 리프만의 근황에 관한 텍스트를 하나로 묶어준다. 이 어휘들이 서로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조명해주기 때문에 이 그물구조 lexical network 를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다음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 체인 혹은 그물이 끊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번역가가 할 일이다.

[She] mourns for her husband. 는 독립적인 예문으로 주어졌을 때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한다.'로 번역될 수 있고 또 이 번역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나 위의 텍스트에 불러들여지면서 예로 든 다른 어휘와 체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의미가 좀더 강화된다. 이렇게 맺은 관계 때문에 원본 텍스트의 전체를 통해 독자에게 연상되는 총체적인 이미지를 어느 정도 살려주려면 '슬퍼한다'라는 말 이외에 달리 쓸 수 있는 어휘가 무엇인지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슬퍼하다 -> 애통해하다' 로 바꾸어주어 좀더 긴밀한 관계망의 결속을 추구한다.

힘든 발걸음 -> 애통 -> 미친 듯 몰아침 -> 필사적 -> 급히 서두름

물론 힘든 발걸음은 모린 리프만이 아닌 저자의 심정을 나타내지만 '상실감으로 인한 깊은 슬픔'이라는 한 테마의 체인에 걸린다.

She makes herself frantically busy. 는 '정신 없이 바쁘게 산다.' '허둥지둥 frantically 눈코 뜰 새 없이 busy 자신을 몰아친다 makes.' 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후자를 택하려고도 했지만 원본의 관계망에 비추어 볼 때 '미친 듯'이 더 잘 맞는 것으로 보고 '미친 듯'으로 결정한다. 이 마지막 결정은 번역자의 언어에 대한 감각과 직관에 달린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이 문장에서 저자가 keeps 라고 하지 않고 makes 라고 한 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keep oneself busy 는 '바쁠 만치 할일을 충분히 찾아서 한다'는 의미인데 keep 의 자리에 make 를 써서 관용구를 깨뜨리는 것은 특별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make 를 통해서 '몰아친다'라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make 에는 '몰아친다' 라는 의미가 없다. 이 문장에서는 cause 정도의 의미로 쓰이지만 이 문장의 다른 어휘 lexical item 와 연동하면서 그런 강제적/인위적인 의미가 잠재해 있다가 드러나는 것이다. '몰아친다' 말고도 다른 표현을 한글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정도에서 타협을 본다.

strenuously 의 경우 초고에서 '힘겹게'로 옮겼다가 '정력적으로 -> 필사적으로' 의 순서로 바뀌었다. 역시 관계망을 고려한 선택이며 본문의 총체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유지해주기 위함이다.

주어진 텍스트에 사용된 어휘가 갖는 관계망과 이 관계망에 의해 이루지는 텍스트의 결속과 합일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번역의 대상이 되는 원본이라고 해서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며 어휘의 관계망이 산만한 글도 많다. 그럴 경우에는 번역자에게 또 다른 숙제가 안겨진다. 번역의 이 측면은 차후에 생각해볼 것이다. 연계성을 갖고 설득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그 이전에 생각해보아야 할 사항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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