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5, 2009

번역비평 (9)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 + 원작 텍스트

다른 포스트에서 코드화니 해독이니, 딱딱한 말까지 애써 동원해가며 원작에서 번역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해서 살펴보았다.

번역본에 불명확한 부분이 있다면, 그 원인의 소재가 원작 텍스트에 있을 수도 있다고, 지난 포스트에서 문제 제기를 했다. 그렇다고 번역자의 책임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그 책임은 다름 아닌 연대 책임이기 때문이다.

또 싫다고 하는 히니 Seamus Heaney 와 예이츠 W. B. Yeats 까지 억지로 끌어들여 기술과 기예를 말하게 했다. 나는 히니에게, 기예가 없는 기술은 생명이 길지 못하고 기술이 없는 기예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말을 해달라고 했는데, 빼어난 술術과 농익은 예藝를 갖춘 시인답게 인식의 경계 부근에 있는 것을 끌어와서 함축적이면서 간명한 정의를 내리고는 이에 부연하려는 예이츠를 데리고 퇴장했다.

이 모두 필요해서 그러는 것이다.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의 이모저모를 살피려다 보니 의외로 늘어나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원작 텍스트를 참조하지 않고 번역 텍스트를 평가할 때, 비평 가능한 범위가 무엇이며 또 어떤 비평기준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있는 생각해보는 과정에 있다. 또한 원작 텍스트에 비추어 번역 텍스트를 평가할 때, 어떤 한계가 있으며 또 어떤 비평준거가 있는지, 이 블로그를 통해서 살펴보는 과정에 있다. 이 구도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번역 텍스트에서 접하는 불명확한 텍스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 보니 코드와 해독이라는 재미없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기술과 예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번역 텍스트의 불명확성 문제를 다루자니 나중에 다루려고 했던 원작 텍스트의 불명확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르렀다.

원작 작가가 사고의 본처本妻와 직관의 첩妾 사이를 왕래한 끝에 착상을 품게 되고, 이 착상은 일정한 기호 또는 활자로 표시(코드화)된다. 착상이 기예에 접接하고, 노련한 기술 이 훌륭한 유모 같은 원예사가 되어준다면, 그 열매는 보기엔 탐스럽고 입에는 꿀 같아질 것이다. 이런 열매 중에서 번역자가 관여하는 것은 이국에서 맛보는 열매다.

번역자는 이국異國의 열매를 맛보고, 이 열매를 재배하는 기술을 배우고, 씨나 접가지를 가져다가 자국自國의 토양에 심는다. 싹을 틔우고 재배하여 자신이 이국의 땅에서 맛본 열매를 수확하려 노력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 열매를 맛뵈기 위해서 참으로 오랜 세월 눈물겨운 일을 한다. (한국의 이접移接 과정과 토양이 이상적이지 않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접어두겠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는 언제나 이상적이다. 최소한 내가 품는 시나리오는 내 자신에게는 언제나 이상적이다. 삼천포로 빠지기 전에 다시 열매로 돌아가자.

지금 얘기하고 있는 열매, 이 원산지의 열매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아직도 혹 골방에 숨어서 나에게 피해를 주는 편견의 이단자가 있는지!

그렇다. 원산지 열매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원산지의 레이블에 대한 신뢰 때문에 혹은 겉으로 보기에 먹음직스러워서 막상 입에 넣어보지만 보기만큼 달지 않은 경우가 있다. 혹은 겉으로 보아서는 먹음직스럽지 않아도 먹어보니 의외인 경우도 있고, 겉을 보니 흠집이 있어도 혹시나 하고 먹어보니 역시나 하는 경우가 있다. 또 포도처럼 일부는 괜찮고 일부는 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외에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원산지 과일에 대한 맹신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한 가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원산지의 토양이 좋을수록 양질의 열매가 산출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요, 확률의 문제이지 반드시 양질의 열매가 산출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 이제 오늘 포스트에서 진짜 얘기하고자 하는 상한—혹은 부분적으로 상한—열매 하나를 손에 들고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겠다.

불명확한 텍스트에 관한 예를 들려고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좋은 예를 발견했다. 내가 요즘 자주 찾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발견한 것이다. 미국의 미술 비평가 아서 단토 Arthur Danto 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 중에 한 짧은 텍스트에 관한 것이다. 서재 주인의 문제 제기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이를 쟁점으로 삼아 논쟁에 참여한 분들의 일부 비판, 비판 과정, 그리고 결말이 아름답지 못했다. (‘아름답지 못했다’고 함으로써 이 발언에 대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을 해줄 부담이 내게 주어짐을 나는 충분히 인식한다. 그리고 이 부담을 덜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가장 큰 불만은 원저자에게 있다. 이 불만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드러날 것이다.

<로쟈의 저공비행>에 실린 문제의 원작 텍스트와 이에 대한 번역 텍스트는 각각 다음과 같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그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전문 번역자 치고 텍스트의 유형을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 소설, 철학, 기술, 기타 등을 비롯한 등등 여러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이런 구분을 해보는 이유는, 번역의 대상이 되는 일정 텍스트 내에서, 번역의 기본적인 방향과 전략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단토는 미술비평가다. 또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한 사람을 제대로 연구해보지 않고 그 사람의 재능과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의 텍스트와 단토의 편지를 보고, 그가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그 이름에 값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떨칠 수가 없다. 내가 명철한 철학자에게서 기대하는 수준에 비추어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예藝는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술術이 못 받쳐주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예藝의 부족함을 술術로 채우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텍스트로 들어가 보겠다.

원작 텍스트의 improbable 에 대한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된 것에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 단어에 대한 번역자의 부정확한 독해 때문이다. (원작 텍스트에서 ‘참 true’ 과 ‘거짓 false’ 을 가릴 수 있는 텍스트의 경우, 이것이 번역되었을 때, 이것을 ‘거짓’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틀렸다’고 하지 않고 ‘부정확 inaccurate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먼저 단어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겠다. “특정 단어, 패턴, 문장 구조 등이 개별적인 ‘의미의 단위’로 분석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기에는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복잡다단‘多端’한 속성을 일단 무시하고, 각 단어를 개별적으로 이해하고 음미해봄으로써, 그 개별적인 단어들을 보다 잘 다룰 수 있기 위하여서라면 개별적인 분석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Baker, 1992: 12)

appreciate ‘어떤 상황/문제를 appreciate 하면, 그것을 이해understand하고 또 그것에 수반/포함 involve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know.’ 원작 텍스트에서 appreciate 의 대상이 his acts 이고 as 가 따르므로, 여기서는 ‘음악이나 음식 등에서 좋은 점을 알아보고, 그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를 제외하고 또 ‘감사한다’는 의미도 제외한다.

edifying (1) 어떤 사물이 edifying (= instructive) 하다고 하면, 그것이 어떤 쪽으로든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무엇을 통해서 내가 배우는 게 있으면, 그것이 edifying 하다고 한다. 예: ‘18세기에는 미술이 음악, 시와 함께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 ‘In the 18th century art was seen, along with music and poetry, as something edifying. (2) 무엇에 대한 불만이나 반감을 나타내고자 할 때나, 또는 그 무엇이 무언가 유쾌하지 않은 것이든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비출 때, 그것이 그리 edifying 하지 않다고 (-> not very edifying -> unedifying) 한다. 예: ‘그 모든 것 때문에 불쾌한 (혹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생각났다.’ = ‘It all brought back memories of a not very edifying past.

그러나 Oxford 사전에는 unedifying 을 따로 올림말로 삼고, 반감을 가지게 할 정도로 유쾌하지 않은 것을 표현하는 말로 정의한다. 예: ‘두 정당 지도자들이 서로 큰소리로 시끄럽게 싸우는 보기 흉한/눈살 찌푸리게 하는 장면’ = ‘the unedifying sight of the two party leaders screeching at each other’

aesthetic distance: 심미적 거리. 영한사전에도 '심미적 거리'로 나와 있는 미학 용어다. 통용되는 명제적 용어이므로 그대로 옮기면 되겠지만 사실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이것은‘독자 혹은 관객과 예술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Dictionary of Literary Terms and Literary Theory, Penguin (1999), p. 10) 예술가(작가/미술가)는 창작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창작물과 독자/관객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부여 the work is distanced 한다. 이 (심리적인) 거리 때문에 창작물을 현실과 혼동하지 않고 미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구문 syntax 을 다룰 때 그 이유를 언급하겠지만, 인문서 번역자가 주제 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아래의 aesthetic delecta
tion 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사전事前에 주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원본을 독해하는 과정, 번역하는 과정에서 리서치를 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심지어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하는 번역보다 더 훌륭한 번역을 할 수도 있다. 전문 서적 번역본의 대상 독자가 일반인일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안시아 벨 Anthea Bell 은 영국의 저명한 번역가다. (나는 그할머니의 번역을 모든 번역의 모범으로 여긴다.) 2002년에 펭귄 출판사가 프로이트 시리즈를 새로 기획하며 일부러 정신 분석학 전문가 혹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벨 할머니에게 프로이트를 맡겼다(The Psychology of Everyday Life). 정신분석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일반 독자로서훌륭한 일반 독자로서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입장에서 실제로 이해해가며 번역했기 때문에 일반 독자가 읽기 편한 번역이 되었다. 사전 주제 지식이 없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 없는 아주 좋은 예다.

render: 이 단어의 여러 의미 중에서 두 가지만 본다. (1) render + 무엇 + 형용사. 이 같이 쓰이며 ‘무엇’이 ‘형용사’가 뜻하는 상태로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 ‘무엇에 틀린 것이 너무 많아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 ‘It contained so many errors as to render (= make) it worthless. (2) 특정 언어로 씌어 있거나 또는 특정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다른 언어나 방식으로 번역 translate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표지판과 안내방송이 안내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되어 있었다.’ -> ‘All the signs and announcements were rendered in English and Spanish.’

improbable: (1) improbable 한 것은 사실일 것 같지 않고 혹은 발생할 것 같지 않다. 예: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 -> ‘a highly improbable (= unlikely) coincidence.’ (2) 내가 무언가를 보고 improbable (= unlikely) 하다고 하면, 그 무엇이 이상하고 뜻밖이거나 strange, 흔치 않거나 unusual, 터무니없는/말도 안 된다는 ridiculous 것을 의미한다. 예: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의 결혼은 흔치 않은 결연結緣으로 보인다.’ -> ‘On the face of it, their marriage seems an improbable alliance.’

aesthetic delectation: aesthetic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형용사로서, ‘미적美的’으로 쓰거나 아름다움을 살핀다는 의미를 살려 ‘심미적審美的’으로 옮길 수 있다. ‘미학적美學的’이라는 말은, 가급적 그 말을 써야 하는 특수 문맥을 빼고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delectation: 내가 누군가의 delectation 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면, 나는 그 누군가를 즐겁게 혹은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예: ‘그녀는 집에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즐겁게 하기 위해 케이크를 만든다.’ -> ‘She makes cakes for the delectation of visitors.’ 이 단어의 개별적인 뜻은 그러하지만, 이 말이 마르셀 뒤셩 Marcel Duchamp 이 한 말이며,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알면 향수享受라는 고상한 말을 쓰기 어렵게 된다. (‘뒤샹’이라고 하지 말고 ‘뒤셩’이라고 하겠다. ‘샹’의 어감이 별로 좋지도 않고 또 원래 발음이 ‘셩’에 가깝기도 한 까닭이다.)

기제품旣製品 [변기, 빗자루 등]의 선택은 심미적 즐거움의 영향을 받아 내려진 선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심미안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각적인 무관심이 보이는 반응에 기초한 선택”이라는 말을 했다. 존 듀이 John Dewey 가 말하는 종류의 전통적인 심미안, 즉 아름다운 것에서 취하는 즐
거움을 경멸하며 한 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도락道樂 이라는 말이 좋다고 생각한다. aesthetic delectation 은 사전적 혹은 명제적 낱말 뜻 propositional meaning 에 화자話者의 감정이나 자세가 실린 말이다. 어의 lexical meaning 의 유형 typology 에서 이것을 ‘표현 의미 expressive meaning’ 라고 부르기도 한다. 표현 의미는 명제적 의미와는 달리, 참이나 거짓으로 평가할 수 없다.

practical demonstration: practical 한 생각/방법은 실제 상황에서 효과적일 것이다. demonstration: 어떤 사실/상황의 demonstration은 그 사실/상황의 명백한 증거 proof 다.

the least likely places: the least likely places = the least probable places = the most unlikely place ≠ the most likely places.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곳, 전혀 뜻밖의 장소,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


단어의 정의는 COBUILD Dictionary of English (Sinclair, 2006) 에 의거함.



이렇게 개별적으로 살펴본 단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작 텍스트의 문장 구조 structure 를 살펴보고 나서 함께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그런 다음, 아서 단토 Arthur Danto 의 편지 내용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논평을 한 뒤, 이 포스트를 끝맺도록 하겠다.

첫 문장의 ‘It’는 ‘to appreciate’ 라는 경험/행위에 대한 코멘트를 도입하는 데 쓰인다. 이 ‘it’는 문법 용어로 가주어假主語라고 불린다. “주어 부분(주부主部)이 길어지는 것을 피하거나, 또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문장 끝에 둠으로써 좀더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하는 데 쓰인다(COBUILD English Grammar (Sinclair, 2005), p. 411).


이 가주어
it와 코멘트 is (just) possible, 그리고 ‘to appreciate’ 를 잠시 떼어놓고 그 다음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practical demonstrations 은 나중에 따로 생각할 것이다.)

His acts set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s.


어려운 구문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것은, 현재분사 rendering 용법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등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에 대해서 추가로 어떤 말을 덧붙이고자 할 때, 주어를 쓰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용법이다. 이 용법에서 현재분사가 이끄는 절은 주절主節을 수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동시성: 누군가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거나,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때, 둘 중 하나는 주절에서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분사가 이끄는 절로 말한다.

Jane watched, weeping, at the doorway.
-> 제인은 문간에서 울며 바라보았다. = 제인은 문간에서 바라보며 울었다.

(2) 순서적: 무엇을 하고 나서, 바로 다른 무엇을 하는 상황을 표현할 때, 먼저 한 것은 분사가 이끄는 절로 말하고, 다음에 한 것은 주절에 말한다.

Leaping out of bed, he dressed so quickly that he put his shoes on the wrong feet.
-> 그는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 나와서 옷을 급히 입는 바람에 신발을 바꿔 신었다.

(3) 이유: 어떤 행동이나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자 할 때, 행동/벌어지는 일은 주절에서 말하고 이에 대한 이유는 현재 분사가 이끄는 절에서 말한다.

At one point I made up my mind to go and talk to him. Then I changed my mind, realizing that he could do nothing to help.
-> 그러다가 한번은 그를 찾아가서 말하려고 작정했지. 그랬다가 그가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었어.

위의 (2)는 He dressed so quickly, leaping out of bed, and put his shoes on the wrong feet. 으로도 쓸 수 있기 때문에 과거분사의 위치만으로는 (2)의 경우인지 (3)의 경우인지 ‘결정적으로’ 알 수 없다. 물론 (3)에 (2)같은 요소가 있다. 깨닫고 ‘나서’ 마음을 고쳐먹었으니까. 그러나 (3)에서는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가 깨달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데, (2)에서는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났기 때문에 옷을 급히 입었다고 딱히 말할 수 없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순서’인지 ‘인과’ 관계인지는 내용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행위는 유익하지 않은/자기 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비계발非啓發적인 대상/오브제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었다.
-> 그의 행위는 이 비계발적인 오브제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었다.
-> 그의 행위는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었다.

(‘유익함’이라고만 하면 뜻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물질적인 유익을 배제하여 ‘정신’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겠다.)

-> 그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가 부여/형성되었다.

위에 설명한 improbable 의 낱말 뜻에서 (1) 은 ‘있을 법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했다. ‘an improbable story’ (Oxford English Dictionary) 는 ‘있을 법하지 않은/가능할 것 같지 않은/거짓말 같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2)는 ‘기대/예상과 달라서 이상하게 보인다’는 뜻이라고 했다. ‘His hair was an improbable shade of yellow.’ 노란 색 머리도 짙음과 옅음 정도에 따라 여러 색조를 띨 수 있는데 그 여자의 노랑머리는 일반적인 노랑머리와 다른, 전혀 생각지 못한 이상한 노랑색이라는 것이다. 변기가 깨끗하고 세련된 미술 전시장 한 복판에 전시되어 있으면 그 전시장은 변기가 있기에 improbable 한 곳이다. 그러나 해당 문장의 나머지 부분에 의해 이 의미는 수정된다.

여기서 candidate 은 ‘어떤 특정한 목적에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사람/사물’ 혹은 ‘어떤 특정한 무엇을 할 것 같거나, 어떤 특정한 무엇이 될 것 같다고 여겨지는 사람/사물’을 뜻한다. 이 단어의 다른 의미, ‘후보’라는 의미나 ‘후보작’이라는 뜻은 이 경우에 어울리지 않는다. a candidate for aesthetic delectation 은, 아직은 그렇지 않지만 앞으로 ‘심미적 도락이/을 될/줄 수 있는 대상’이다. 화가가 그림을 완성해서 전시장에 걸면, 이 그림은 a candidate for aesthetic delectation이 된다. 전시된 이 그림이 관람객에게 심미적인 즐거움을 주면, 이 그림은 비로소 그 특정 관객과의 ‘심리적인 관계’에 있어서 candidate 라는 딱지를 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these unedifying objects 가 그런 미도락美道樂의 대상이 되기에는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지만 어쨌든 이것들을 그 미도락의 대상 candidates 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이 문장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현재분사 rendering 가 이끄는 절은, 주절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며, 이유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이 현재분사가 이끄는 절은, 종속절 finite clause 이 아니라 비종속절 non-finite 이다.
주절을 수식하거나 한정하는 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한 심미적 도락의 대상으로 해석하고
->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render 는 ‘... 으로 삼고’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여기서는 render 의 (2) 에 해당하는 의미를 선택했다. render 는 주어진 예문의 render… in(to)… 말고도 render… as… 로 쓸 수 있는데, 그 용법이 약간 다르다. 예문을 보면 그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The Korean phrase can be rendered as ‘I love you.’

translate 는 물론 ‘번역하다’라는 의미다. 저자가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 ‘carry across’ 를 생각하고 일종의 시적인 허용 poetic license 을 발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render 가 예술 작품의 창작 행위와 관련해서 쓰일 때, ‘무엇을 표현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하지만 여기서 이 의미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구문 구조가 그러그러하고, 이 구문의 의미가 그러그러하기 때문이다. ‘삼다’에 ‘무엇을 무엇이 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나도 ‘시적인 허용’이란 걸 써보는 것이다.

그럼 두 절을 합쳐보자.

(그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 (그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가 부여/형성되었다.
->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부여한 것으로 그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혹은 그런 이해는 가능성일 뿐이다’라고
저자가 왜 그랬을까? 의문에 철저해야 한다. 그 대답은 원작 텍스트에 주어져 있지 않다. 이 자리에 인용된 텍스트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는 얘기다. 그 대답은 뒤셩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럼 뒤셩에게 물어볼까? 위에서 인용한 말을 다시 밑에 써본다.

“기제품旣製品 [변기, 빗자루 등]의 선택은 심미적 즐거움/도락의 영향을 받아 내려진 선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심미안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각적인 무관심이 보이는 반응에 기초한 선택”이다.


뒤셩은 그 물건들을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이라고 여기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순전한 무관심 가운데 눈에 띠는 띄는 아무거나 그냥 취한 셈이다. 그가 그런 사물을 선택한 것은 ‘심미’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 동기動機는 그게(심미)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있다면 '무관심'이라는 것이라고 극구 주장한다. 뒤셩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도 뭔가 있겠지 하고 많은 사람들이 끈질기게 들러붙어 그에게 질문을 했다. (뒤셩은 물론 이것을 즐겼다.) 여기에 단토도 가만있을 수 없어 자신의 통찰력을 만천하에 알려야만 한다. 즉, 뒤셩이 그 물건들에 심미적 거리를 준 것은, 순전한 무관심에서가 아니라, 또 순전한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은 아니라 하더라도−즉 그것이 아무리 이상한/비정상적인 improbable 대상이라 하더라도−어쨌든 대상으로 삼아서/취해서/변용해서, 미술관에 전시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just) 라는 말을 끼워넣으며 자기 소견은 충분히 피력하면서, 그것은 그저 의견/가능성일 뿐이라고 슬쩍 양다리 걸치는 것이다.

practical demonstrations 이하는 앞선 문장에 대한 추가 정보/설명이다. 여기서 쓰인 콜론 colon 의 의미가 그러하다.

beauty of a sort: 여기서 of a sort 는 ‘모종의, 일종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의미로 쓰려고 했으면 of some sort 라고 했을 것이다. of a sort 로 앞의 명사를 한정한다. 왠지 질이 좀 떨어지거나 수준 이하인 무엇을 형용해주는 말이다
of sorts 로 쓸 수도 있다. 바꿔 말하자면, beauty of a sort 는 일반적으로 beauty 라고 여겨지는 요소는 갖추고 있지 않아서 딱히 beauty 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beauty 이기는 한 것이라는 의미다. beauty of a poor kind 또는 mediocre beauty 라고 봐도 좋다.

in the least likely places: 이것은 분명 한 가지 의미로밖에 읽히지 않는데, 논쟁이 오간 내용을 보고 quot hominess, tot sententiae 라는 라틴어 문구가, 진부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진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제각기 생각이 다르다는 뜻이다. 신발을 셔츠라고 하면, 그렇다/아니다, 참/거짓으로 가릴 수 있다. 명제적인 의미 propositional meaning 를 가진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place 도 마찬가지다. 장소/위치를 의미하거나 상징하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문제의 텍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 명쾌한 문장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냥 대충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인 단토의 답장이다.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이 문제의 텍스트에서 그는 place 가 갤러리 같은 전시 공간을 가리킨다고 한다. 저자가 우기면 할 수 없다. 그러면 게임 끝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니다. 저자는 얼마든지 우길 수 있지만, 게임 종료 호루라기를 부는 것은 독자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 u 가 아니고 v 아니냐고 묻는데 저자가 u 라고 하면 그걸로 끝이지만, u 를 쓰려고 했으면 u 가 v 로 보이지 않게 잘 쓰라고 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저자의 주장은 주장에 기초하면 문제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꿔 써볼 수 있다.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unedifying objects, exhibited in the least likely places for them to be.

One may find beauty of a sort (even) in the unedifying objects, when once they are exhibited where one may not expect them they are least expected to be.

그럼 다음과 같은 문장을 한번 보자.

Often the best fish ar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좋은 물고기가 잡히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는 말이다. 좋은 물고기가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지 않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심미적 대상, 즉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란 게 있으리라고 기대되지 않는 화장실, 부엌, 길거리, 상점 (the least likely places) 등, 이런 곳에서 발견하는 물건도 심미적인 거리가 부여(미술관 전시)되면, 심미적 대상
뒤셩의 시대 이전, 전통적인 미술관에서 보던 전통적인 예술품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더라도이 될 수 있다는 문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만 of a sort 가 있어서 완전히 깔끔한 읽기 reading 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변기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 in the least likely places, 즉 미술관의 전시장에 전시물로 전시됨으로써, 이 변기가 미술품이 된다는 의미로 그렇게 썼다는 것이 단토의 말이다.

어쨌든 미술 전시장에서는 고품격 미술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미술품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기대하는 것은
질이 좋든 떨어지든정상적인/자연스런 현상이다. 단토는 of a sort 를 씀으로써 그런 의미가 십분 전달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 외에는 그렇게 볼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미흡한 문장이다. 분명하지 않다. 정리해보자.

전혀 뜻밖인 곳에서 격이 떨어지는 미美가 발견될 수 있다는 실제적인 증거.
->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좀 모자라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단순히 이론이 아닌) 실제적 증거다.

(그러나 practical을 virtual, almost 의 의미로 다시 보고 다음과 같이 옮겨본다. 시범/입증에는 본질적으로 실제적인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practical 의 의미를 가볍게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 아름다움은, 격이 좀 떨어지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즉, 뒤셩은 그런 것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위의 결과가 그것을 입증한 셈이 되었다는 의미다.)


모두 종합해보자.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부여한 것으로써 그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가능하다. 아름다움은, 격이 좀 떨어지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 그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이것은 가능성일 뿐이다). [뒤셩이]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심미적 도락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부여했다. 부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격이 격은 좀 떨어지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단토가 훌륭한 철학과 비평안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단토는 스스로 “대중 일반에게 시각 예술과 그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주된 역할”이라고 한다. 단토는 “심미적 즐거움은 위험한 것이며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한 예술품을 놓고 그것을 말로 설명하고, 이해하고, 이 말을 통해서 정신적인 함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시각 예술을 보고, 말을 통해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평범한 일반인을
그런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실천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의 글이라고 보기에는 인용 텍스트가 미흡하다는 것이, 이 원작 텍스트에 대해서 내리는 나의 평가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부분적인 이해로 단토의 전체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즉, 이 텍스트에 한해서 내리는 평가라는 것이다.

단토는 그의 편지에서 심미적 거리를 설명하며 E. Ballough 를 언급한다
사실은 Ballough 가 아니라 Bullough 다. 벌러우가 1912년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psychical distance as a factor in art’를 언급했고,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쓰기 시작했지만, 사실 이것은 칸트의 <판단력 비평>(1790)에서 훨씬 오래전에 이미 언급되었던 개념이다.

앞선 포스트(01-18-09)에서 사상의 코드화 얘기를 했고, 다른 포스트(01-20-09)에서는 히니 Seamus Heaney 의 예술관을 들먹거렸다. 단토의 사상이 훌륭할지는 모르지만, 즉 히니의 말을 빌자면, 예藝는 있을지 모르지만 예를 푸는 술術(착상을 정교한 기호로 변환해주는 기술)이 그만 못하다는 인상이다. 아니면, 저자의 사상思想, 활자로 코드화되기 전, 머릿속에 무형으로 운행하던 착상의 무리 자체에 질서와 명확함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경우에는 아무리 술術이 뛰어나도 명쾌한 사상이 담기지 못하니까. 그러나 이것은 단편을 통한 인상일 뿐이며 그의 글을 더 읽으면 그 부정적인 인상이 지워질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철학자, 사상가일수록 그들의 글이 명쾌하다. 특정 개념이 심원하여 어려울 수는 있을지언정 구문과 글결은 명쾌하고 정치精緻하다. 인문 계통의 저자들에게서보다, 훌륭한 수학자나 과학자들 가운데서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발견할 확률이 더 높다. 자신의 사상을 책으로 써서 내는 것은, 소통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런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누구를 탓해야 할까?

독자에게그 책임 소재가 있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정밀 독해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경우, 많은 것을 놓치거나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근래, 개인 컴퓨터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정보의 교환이 쉬워졌고 그 양은 넘쳐난다. 이 모든 것을 소화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때문인지 많은 양의 정보를 섭취한다. 학교에서도 수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대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속독을 할 필요가 있다. 또 속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학생, 학자들의 현실이다. 정밀 독해는 점점 실종되어 가고 있다. 심지어는 학교에서조차도 그렇다. 많은 양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의 텍스트를 번역한 분을 탓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분도 정밀 독해가 실종된 교육의 산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저 시간에 내몰려 성의 없는 번역이 되었을 수도 있다. 사회와 학원의 일반적인 환경이 그렇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다. 단정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은 책을 번역하느라 애를 썼을 것 같다. 한두 문장에 돋보기를 들이대어서 이 정도 비판을 받지 않을 번역서는, 특히 인문 교양서는 별로 없으리라고 짐작한다. 나는 번역서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문제의 텍스트 말고, 나머지를 충분히 고려해보면, 긍정적인 면도 있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재미있는 텍스트를 번역해도 번역 작업은 고되다. 이 일의 본질이 그렇다. 육체적으로 상당한 지구력을 요할 뿐더러, 정신적인 노동의 양과 시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적인 보상이 이에 값하지 못한다.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실한 번역에 대한 번역자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른 생계 수단이 있고, 충실한 번역을 할 시간적인 여건이 되지 않으면 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가 그 번역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핀잔이다. 이 문제의 텍스트는 번역자의 실력을 가늠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논쟁이 아름답게 끝나지 않았다고 앞서 언급했다.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 이해를 구하는 것은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편지 내용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언급하고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는 행위는 아름답지 못하다. 이상적인 방법은, 번역자가 그 부분에 대한 자신의 번역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이겠고, 실수를 깨달을 경우, 실수였다고 인정하는 것일 게다. 자신의 번역이 옳다고 생각되지만, 그에 대한 비평이 여전히 존재할 경우, 역자 자신이 원저자의 의견을 받아 끝을 내는 것이 옳다. 독자가 직접 원저자를 접촉하기로 하면, 개인적인 탐구 차원에서 임해야 할 것이다. 원저자에게
번역자의 잘못을 통지하는 번역자의 이름과 학교까지 언급하고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형식은 어떤 동기에서든 옳지 않다. 번역자에게 못할 짓이며, 집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바깥에 끌고 나가 안팎으로 망신살 뻗치는 경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 심미적인 거리라고 해도 좋다 - 생각해보면, 국제적으로 자기 얼굴에 침뱉기인 것이다. 또 설사 해결이 안 되면 어떤가? 문제 의식만 고취했으면, 환기되었으면 어쩌면 그로서 그것으로 충분했을지 모른다. 번역자가 무언가 깨닫고, 출판사가 위기 의식을 느끼고, 독자가 비평안을 가져야겠다고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말이다.

활자 전문의 전당에 걸린 간판만 보고 활자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도 경계할 일이지만, 어떤 활자에 문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 간판마저 송두리째 폐물 처리하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학업의 공력工力이 그러하다. 가벼이 볼 수 없는, 땀이 배인 시간의 산물인 까닭이다. 간판이 내세우는 내용에 값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지만 그것은 어느 면을 보느냐에 따른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의 텍스트를 생각하며 단토의 다른 글들을 이것저것 읽어보았지만 역시 내가 즐길만한 문장은 아니다. 사족을 달아보았다.

나도 번역비평을 두고 지속적인 고찰을 하고 있지만, 번역비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라는 것 자체가 단순하지 않은 데다, 오역을 분별해내는 것은 비평의 한 작은 부분에 속하고,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수많은 양상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

번역비평에서 불명확한 텍스트를 생각하는 과정에 단토의 텍스트를 끌어다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내가 이 포스트에서 행한 것은 사실 비평이라고 볼 수 없다. 전체 텍스트가 아닌 데다가 어의와 구문 분석 parse 에 그쳤기 때문이다. 초보적인 것이다. 전체를 보고, 전체의 특성에 비추어 일관성 있는 기준으로 세목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다. 불명확한 텍스트는, 특히 이것이 오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사실 김새는 일이다. 더구나 첫장부터 그런 것이 발견되면 나머지는 읽고 싶지 않게 된다. 이렇게 오역으로 의심되는 부분을 논하고자 하면,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비평자의 의견을 개진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이것은 내가 여기서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인데대상이 되는 번역 텍스트를 분석하며 번역자가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실수했는지 추론해보는 과정도 자세히 보여주어야 한다. 번역비평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공정하고 균형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번역비평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번역자로서의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함이고 내 자신의 번역을 돌아보는 도구를 갖추기 위함이다.

아무튼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의 발생 요인이 원작 텍스트에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다, 예를 들어 생각하다 보니 좀 길어졌다. 번역의 질을 논할 때 원작 텍스트와의 비교가 불가피한 것은, 번역 텍스트의 하자를 가려보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원작 텍스트에 대한 평가도 함께 내려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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