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재(Brother Anthony) | 한국문학 번역가, 서강대 명예교수
한국인들은 흔히 한국문학이 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 출간된 작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1년 이후에 70편이 넘는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작품 수는 분명히 그보다 더 많다. 자주 듣는 또다른 말은, 한국문학의 번역은 형편없어서 노벨문학상 같은 것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첫번째 답변은, 최근에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있다는 것이다. 번역과 성공적인 마케팅은 노벨상을 타는 선행조건이 아니다. 두번째 답변은 지난 10년간 내가 봐온 한국문학 번역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충분히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상당히 괜찮다는 것이다. 세번째 답변은 노벨상 수여기관인 스웨덴 왕립아카데미 회원들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씌어진 문학작품을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명백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그들이 내린 판단은 대부분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동상이몽
그러나 한국문학의 번역과 홍보가 당면한 문제는 분명히 있다. 첫째, 번역될 작품을 선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의 문화, 정부 관계자들은 대개 이미지 선전으로써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려는 총제적인 캠페인의 일환으로, 널리 상찬되고 정평있는 '유명한' 한국작가들의 번역을 추진하려고 한다. 한국문학사를 가르치는 학계의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판단하기에 근대 한국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작품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늘날 해외의 상업출판업자들의 관심은 단 한가지에 집중된다. 즉 그들은 재정적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자기들의 위신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팔리는 작품을 출판하려고 한다. 한국측의 '문헌적 정보' 프로젝트와 '성공・수익'에 대한 외국 출판업자들의 요구 사이에는 직접적인 갈등이 있는데, 이 갈등은 런던이나 빠리, 뉴델리 등지에서 현재 어떤 종류의 문학작품이 잘 팔리는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문학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므로 전세계가 그 한국 작품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일은 없다. 최근에 나는 한 유명한 한국작가가 너무 많은 젊은 한국작가들이 1인칭 화자를 도입해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사실적인’ 스타일로 창작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세계문학으로 진출하려면 국제감각부터 익혀야
그의 비판은 (나는 그 논평의 전문을 보지 못했지만) 많은 한국문학 작품에서 서술자의 복합성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많은 한국 소설은 시작에서 출발해 간혹 회상이 섞여 들어가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어색한 결말로 끝맺는다. 외국의 성공적인 소설은 이렇게 창작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문학을 '세계화'하기를 바랄 때 한국이 당면한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오늘날 세계의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국 작가들과 독자에게 교육하는 것이다. 현재 번역과 출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 문학작품을 바깥에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동시대 외국의 탁월한 작가들을 한국독자에게 알리는 일이다. 전해지는 근래의 일본소설의 성공담은 그 점을 확인해준다.
많은 기성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을 현대인의 시청각매체에 대한 집착 탓으로 손쉽게 돌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독자들이 뭔가 더 나은, 진정으로 새롭고 즐거운, (최소한 때때로) 생각을 자극하는 그런 작품을 원한다는 사실의 징표이기도 하다. 양질의 현대 세계문학의 번역을 한국의 출판인들이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에 해가 되는 일이다.
외국독자들이 말하는 한국의 시와 소설
오늘날 세계에서 시는 대부분 잘 팔리지 않는다. 상을 타고 비평의 주목을 받으면서 수익을 내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시가 지난 20년간 한국소설보다 영어로 그렇게나 많이 출간되었는가? 나 자신만 해도 시집을 거의 20여권을 번역했지만 번역한 소설은 3권에 불과하다.
이 물음에 대한 한가지 답변은, 한국 시는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고 활기차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 시인들은 번역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특정한 한국적 삶의 경험에 대해 쓴다. 그들의 시는 살아 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독특하게 인간적이다. 물론 그 시적 효과를 위해 주로 한국어의 특징에 의존하는 시인들은 번역으로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외국독자들에게 어떤 한국 시들의 영향은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으레 이렇게 묻는다. "작품이 왜 이렇게 우울한가?" 시는 자주 고통스러운 상황에 복합적이며 개인적인 반응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목소리를 듣게 한다. 물론 소설은 시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한국 소설가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아한 문체, 다양한 서술 리듬, 해석의 모호함, 여러 서술자들의 목소리, 글쓰기 전략에서의 복합성 등은 모두 시로서의 소설이 갖는 근본적인 특성들인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체면치레하지 말고 치열하게 비판하라
물론 어느 면에서는 한국작가들이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효과적인 대화가 성숙되지 않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어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탓도 있다. 서평 형식으로 (때로는 맹렬하게) 표현되는 문학비평은 국제적인 문학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모든 작가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자기에게 너그러운 것이다. 사려깊고 도전적인 비평 없이 어떤 작가가 기량을 연마하고 약점을 고치고 성숙한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할 수 있겠는가? '체면'과 '명성'이 핵심 고려사항인 한국 같은 문화에서 정직한 비평은 자주 거부된다. 이건 큰일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창작되는 작품과의(반드시 북미나 유럽의 작품일 필요는 없다)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이 다시 태어나려면, 문단이나 학계의 '고참'들이 젊은 작가에 대해 후견인 노릇을 하고 평가하는 여전히 강력한 위계구조는 철폐하고,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자유를 찾아야만 한다. 그런 새로운 한국문학이라면 번역될 때 찬사를 받을 가능성이 휠씬 크다. 또한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핵심적인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7.5.15 ⓒ 안선재 2007
Friday, February 6, 2009
한국문학 번역의 과제들
Thursday, January 29, 2009
쉬어 가기
어쨌든 원작 텍스트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명확한 텍스트에 대한 책임이 1차적으로 번역자에게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다음으로는 편집자 copyeditor 에게 있을 것이다. 번역 텍스트를 읽고 자체 내에 일관성이 없거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잡아내고 번역자에게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것의 변용>에 관해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는 편집자도 자유하지 못한 것이다.
번역자는 자기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부단히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별로 세운 것은 없어도 허물기 위해 번역비평을 생각해보고 있다. 나는 이 블로그를 사적인 블로그라고 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일종의 모순어법 oxymoron 이라는 사실 또한 깊이 인식하고 있다. 나의 생각을 인터넷에 올릴 때는 누군가 읽으리라는 것을 예기치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 그래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 불특정 다수가 아닌 소수, 그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블로그에 내 생각을 올린다면, 과연 이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나르시시즘의 한 형태인가? 나는 아닌 것 같지만 혹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으니 말이다.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번역이론에 대해서 지속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장치. . . 시간이 없거나 귀찮아도 지속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 장치라고 우겨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 혼자 공책에다 끄적거리는 것보다는 강제적인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또 이 생각한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무슨 일에든 개선하고 발전하기 힘든 법이다. 나는 부단히 허문다. 한편, 세우는 것이 없으면 허물 것도 없는 법 - 따라서 나는 부단히 세우며 허물고 있다.
책을 번역해가며 나타나는 난점이나 재미있는 점들을 기록해두고 또 필요시 나중에 공개하기 위해 시작하였지만, 번역의 이론과 실제를 두루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필요에 의해 번역 비평의 준거를 살펴보고 있다.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이지만 재미는 없다. 이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쓰든지. . . 아니면 제발트나 벤야민도 고독할 테니 그들과 얘기나 나눌까. . . 아니면 워즈워드에게서 위로를. . .
Are beautiful and fair;
The sunshine is a glorious birth;
But yet I know, where'er I go,
That there hath passed away
a glory from the earth.
윌리엄 위즈워드의 송시에서
Trans. Gene
Sunday, January 25, 2009
번역비평 (9)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 + 원작 텍스트
번역본에 불명확한 부분이 있다면, 그 원인의 소재가 원작 텍스트에 있을 수도 있다고, 지난 포스트에서 문제 제기를 했다. 그렇다고 번역자의 책임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그 책임은 다름 아닌 연대 책임이기 때문이다.
또 싫다고 하는 히니 Seamus Heaney 와 예이츠 W. B. Yeats 까지 억지로 끌어들여 기술과 기예를 말하게 했다. 나는 히니에게, 기예가 없는 기술은 생명이 길지 못하고 기술이 없는 기예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말을 해달라고 했는데, 빼어난 술術과 농익은 예藝를 갖춘 시인답게 인식의 경계 부근에 있는 것을 끌어와서 함축적이면서 간명한 정의를 내리고는 이에 부연하려는 예이츠를 데리고 퇴장했다.
이 모두 필요해서 그러는 것이다.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의 이모저모를 살피려다 보니 의외로 늘어나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원작 텍스트를 참조하지 않고 번역 텍스트를 평가할 때, 비평 가능한 범위가 무엇이며 또 어떤 비평기준이 있을 수 있는지
원작 작가가 사고의 본처本妻와 직관의 첩妾 사이를 왕래한 끝에 착상을 품게 되고, 이 착상은 일정한 기호 또는 활자로 표시(코드화)된다. 착상이 기예에 접接하고, 노련한 기술
번역자는 이국異國의 열매를 맛보고, 이 열매를 재배하는 기술을 배우고, 씨나 접가지를 가져다가 자국自國의 토양에 심는다. 싹을 틔우고 재배하여 자신이 이국의 땅에서 맛본 열매를 수확하려 노력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 열매를 맛뵈기 위해서 참으로 오랜 세월 눈물겨운 일을 한다. (한국의 이접移接 과정과 토양이 이상적이지 않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접어두겠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는 언제나 이상적이다. 최소한 내가 품는 시나리오는 내 자신에게는 언제나 이상적이다. 삼천포로 빠지기 전에 다시 열매로 돌아가자.
지금 얘기하고 있는 열매, 이 원산지의 열매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아직도 혹 골방에 숨어서 나에게 피해를 주는 편견의 이단자
그렇다. 원산지 열매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원산지의 레이블에 대한 신뢰 때문에 혹은 겉으로 보기에 먹음직스러워서 막상 입에 넣어보지만 보기만큼 달지 않은 경우가 있다. 혹은 겉으로 보아서는 먹음직스럽지 않아도 먹어보니 의외인 경우도 있고, 겉을 보니 흠집이 있어도 혹시나 하고 먹어보니 역시나 하는 경우가 있다. 또 포도처럼 일부는 괜찮고 일부는 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외에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원산지 과일에 대한 맹신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한 가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원산지의 토양이 좋을수록 양질의 열매가 산출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요, 확률의 문제이지 반드시 양질의 열매가 산출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 이제 오늘 포스트에서 진짜 얘기하고자 하는 상한—혹은 부분적으로 상한—열매 하나를 손에 들고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겠다.
불명확한 텍스트에 관한 예를 들려고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좋은 예를 발견했다. 내가 요즘 자주 찾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발견한 것이다. 미국의 미술 비평가 아서 단토 Arthur Danto 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 중에 한 짧은 텍스트에 관한 것이다. 서재 주인의 문제 제기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이를 쟁점으로 삼아 논쟁에 참여한 분들의 일부 비판, 비판 과정, 그리고 결말이 아름답지 못했다. (‘아름답지 못했다’고 함으로써 이 발언에 대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을 해줄 부담이 내게 주어짐을 나는 충분히 인식한다. 그리고 이 부담을 덜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가장 큰 불만은 원저자에게 있다. 이 불만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드러날 것이다.
<로쟈의 저공비행>에 실린 문제의 원작 텍스트와 이에 대한 번역 텍스트는 각각 다음과 같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그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전문 번역자 치고 텍스트의 유형을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 소설, 철학, 기술, 기타
단토는 미술비평가다. 또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한 사람을 제대로 연구해보지 않고 그 사람의 재능과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의 텍스트와 단토의 편지를 보고, 그가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그 이름에 값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떨칠 수가 없다. 내가 명철한 철학자에게서 기대하는 수준에 비추어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예藝는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술術이 못 받쳐주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예藝의 부족함을 술術로 채우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텍스트로 들어가 보겠다.
원작 텍스트의 improbable 에 대한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된 것에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 단어에 대한 번역자의 부정확한 독해 때문이다. (원작 텍스트에서 ‘참 true’ 과 ‘거짓 false’ 을 가릴 수 있는 텍스트의 경우, 이것이 번역되었을 때, 이것을 ‘거짓’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틀렸다’고 하지 않고 ‘부정확 inaccurate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먼저 단어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겠다. “특정 단어, 패턴, 문장 구조 등이 개별적인 ‘의미의 단위’로 분석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기에는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복잡다단‘多端’한 속성을 일단 무시하고, 각 단어를 개별적으로 이해하고 음미해봄으로써, 그 개별적인 단어들을 보다 잘 다룰 수 있기 위하여서라면 개별적인 분석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Baker, 1992: 12)
appreciate ‘어떤 상황/문제를 appreciate 하면, 그것을 이해understand하고 또 그것에 수반/포함 involve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know.’ 원작
edifying (1) 어떤 사물이 edifying (= instructive) 하다고 하면, 그것이 어떤 쪽으로든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무엇을 통해서 내가 배우는 게 있으면, 그것이 edifying 하다고 한다. 예: ‘18세기에는 미술이 음악, 시와 함께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 ‘In the 18th century art was seen, along with music and poetry, as something edifying. (2) 무엇에 대한 불만이나 반감을 나타내고자 할 때나, 또는 그 무엇이 무언가 유쾌하지 않은 것이든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비출 때, 그것이 그리 edifying 하지 않다고 (-> not very edifying -> unedifying) 한다. 예: ‘그 모든 것 때문에 불쾌한 (혹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생각났다.’ = ‘It all brought back memories of a not very edifying past.
그러나 Oxford 사전
aesthetic distance: 심미적 거리. 영한사전에도 '심미적 거리'로 나와 있는 미학 용어다. 통용되는 명제적 용어이므로 그대로 옮기면 되겠지만 사실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이것은‘독자 혹은 관객과 예술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Dictionary of Literary Terms and Literary Theory, Penguin (1999), p. 10) 예술가(작가/미술가)는 창작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창작물과 독자/관객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부여 the work is distanced 한다. 이 (심리적인) 거리 때문에 창작물을 현실과 혼동하지 않고 미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구문 syntax 을 다룰 때 그 이유를 언급하겠지만, 인문서 번역자가 주제 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아래의 aesthetic delecta
render: 이 단어의 여러 의미 중에서 두 가지만 본다. (1) render + 무엇 + 형용사. 이 같이 쓰이며 ‘무엇’이 ‘형용사’가 뜻하는 상태로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 ‘무엇에 틀린 것이 너무 많아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 ‘It contained so many errors as to render (= make) it worthless. (2) 특정 언어로 씌어 있거나 또는 특정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다른 언어나 방식으로 번역 translate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표지판과 안내방송이 안내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되어 있었다.’ -> ‘All the signs and announcements were rendered in English and Spanish.’
improbable: (1) improbable 한 것은 사실일 것 같지 않고 혹은 발생할 것 같지 않다. 예: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 -> ‘a highly improbable (= unlikely) coincidence.’ (2) 내가 무언가를 보고 improbable (= unlikely) 하다고 하면, 그 무엇이 이상하고 뜻밖이거나 strange, 흔치 않거나 unusual, 터무니없는/말도 안 된다는 ridiculous 것을 의미한다. 예: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의 결혼은 흔치 않은 결연結緣으로 보인다.’ -> ‘On the face of it, their marriage seems an improbable alliance.’
aesthetic delectation: aesthetic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형용사로서, ‘미적美的’으로 쓰거나 아름다움을 살핀다는 의미를 살려 ‘심미적審美的’으로 옮길 수 있다. ‘미학적美學的’이라는 말은, 가급적 그 말을 써야 하는 특수 문맥을 빼고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delectation: 내가 누군가의 delectation 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면, 나는 그 누군가를 즐겁게 혹은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예: ‘그녀는 집에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즐겁게 하기 위해 케이크를 만든다.’ -> ‘She makes cakes for the delectation of visitors.’ 이 단어의 개별적인 뜻은 그러하지만, 이 말이 마르셀 뒤셩 Marcel Duchamp 이 한 말이며,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알면 향수享受라는 고상한 말을 쓰기 어렵게 된다. (‘뒤샹’이라고 하지 말고 ‘뒤셩’이라고 하겠다. ‘샹’의 어감이 별로 좋지도 않고 또 원래 발음이 ‘셩’에 가깝기도 한 까닭이다.)
“기제품旣製品 [변기, 빗자루 등]의 선택은 심미적 즐거움의 영향을 받아 내려진 선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심미안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각적인 무관심이 보이는 반응에 기초한 선택”이라는 말을 했다. 존 듀이 John Dewey 가 말하는 종류의 전통적인 심미안, 즉 아름다운 것에서 취하는 즐
practical demonstration: practical 한 생각/방법은 실제 상황에서 효과적일 것이다. demonstration: 어떤 사실/상황의 demonstration은 그 사실/상황의 명백한 증거 proof 다.
the least likely places: the least likely places = the least probable places = the most unlikely place ≠ the most likely places.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곳, 전혀 뜻밖의 장소,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
단어의 정의는 COBUILD Dictionary of English (Sinclair, 2006) 에 의거함.
이렇게 개별적으로 살펴본 단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작 텍스트의 문장 구조 structure 를 살펴보고 나서 함께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그런 다음, 아서 단토 Arthur Danto 의 편지 내용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논평을 한 뒤, 이 포스트를 끝맺도록 하겠다.
첫 문장의 ‘It’는 ‘to appreciate’ 라는 경험/행위에 대한 코멘트를 도입하는 데 쓰인다. 이 ‘it’는 문법 용어로 가주어假主語라고 불린다. “주어 부분(주부主部)이 길어지는 것을 피하거나, 또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문장 끝에 둠으로써 좀더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하는 데 쓰인다(COBUILD English Grammar (Sinclair, 2005), p. 411).
이 가주어
His acts set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s.
어려운 구문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것은, 현재분사 rendering 용법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등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에 대해서 추가로 어떤 말을 덧붙이고자 할 때, 주어를 쓰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용법이다. 이 용법에서 현재분사가 이끄는 절은 주절主節을 수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동시성: 누군가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거나,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때, 둘 중 하나는 주절에서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분사가 이끄는 절로 말한다.
Jane watched, weeping, at the doorway.
-> 제인은 문간에서 울며 바라보았다. = 제인은 문간에서 바라보며 울었다.
(2) 순서적: 무엇을 하고 나서, 바로 다른 무엇을 하는 상황을 표현할 때, 먼저 한 것은 분사가 이끄는 절로 말하고, 다음에 한 것은 주절에 말한다.
Leaping out of bed, he dressed so quickly that he put his shoes on the wrong feet.
-> 그는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 나와서 옷을 급히 입는 바람에 신발을 바꿔 신었다.
(3) 이유: 어떤 행동이나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자 할 때, 행동/벌어지는 일은 주절에서 말하고 이에 대한 이유는 현재 분사가 이끄는 절에서 말한다.
At one point I made up my mind to go and talk to him. Then I changed my mind, realizing that he could do nothing to help.
-> 그러다가 한번은 그를 찾아가서 말하려고 작정했지. 그랬다가 그가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었어.
위의 (2)는 He dressed so quickly, leaping out of bed, and put his shoes on the wrong feet. 으로도 쓸 수 있기 때문에 과거분사의 위치만으로는 (2)의 경우인지 (3)의 경우인지 ‘결정적으로’ 알 수 없다. 물론 (3)에 (2)같은 요소가 있다. 깨닫고 ‘나서’ 마음을 고쳐먹었으니까. 그러나 (3)에서는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가 깨달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데, (2)에서는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났기 때문에 옷을 급히 입었다고 딱히 말할 수 없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순서’인지 ‘인과’ 관계인지는 내용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행위는 유익하지 않은/자기 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비계발非啓發적인 대상/오브제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었다.
-> 그의 행위는 이 비계발적인 오브제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었다.
-> 그의 행위는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었다.
(‘유익함’이라고만 하면 뜻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물질적인 유익을 배제하여 ‘정신’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겠다.)
-> 그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가 부여/형성되었다.
위에 설명한 improbable 의 낱말 뜻에서 (1) 은 ‘있을 법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했다. ‘an improbable story’ (Oxford English Dictionary) 는 ‘있을 법하지 않은/가능할 것 같지 않은/거짓말 같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2)는 ‘기대/예상과 달라서 이상하게 보인다’는 뜻이라고 했다. ‘His hair was an improbable shade of yellow.’ 노란 색 머리도 짙음과 옅음 정도에 따라 여러 색조를 띨 수 있는데 그 여자의 노랑머리는 일반적인 노랑머리와 다른, 전혀 생각지 못한 이상한 노랑색이라는 것이다. 변기가 깨끗하고 세련된 미술 전시장 한 복판에 전시되어 있으면 그 전시장은 변기가 있기에 improbable 한 곳이다. 그러나 해당 문장의 나머지 부분에 의해 이 의미는 수정된다.
여기서 candidate 은 ‘어떤 특정한 목적에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사람/사물’ 혹은 ‘어떤 특정한 무엇을 할 것 같거나, 어떤 특정한 무엇이 될 것 같다고 여겨지는 사람/사물’을 뜻한다. 이 단어의 다른 의미, ‘후보’라는 의미나 ‘후보작’이라는 뜻은 이 경우에 어울리지 않는다. a candidate for aesthetic delectation 은, 아직은 그렇지 않지만 앞으로 ‘심미적 도락이/을 될/줄 수 있는 대상’이다. 화가가 그림을 완성해서 전시장에 걸면, 이 그림은 a candidate for aesthetic delectation이 된다. 전시된 이 그림이 관람객에게 심미적인 즐거움을 주면, 이 그림은 비로소 그 특정 관객과의 ‘심리적인 관계’에 있어서 candidate 라는 딱지를 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these unedifying objects 가 그런 미도락美道樂의 대상이 되기에는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지만 어쨌든 이것들을 그 미도락의 대상 candidates 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이 문장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현재분사 rendering 가 이끄는 절은, 주절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며, 이유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이 현재분사가 이끄는 절은, 종속절 finite clause 이 아니라 비종속절 non-finite 이다.
이상한 심미적 도락의 대상으로 해석하고
->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render 는 ‘... 으로 삼고’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여기서는 render 의 (2) 에 해당하는 의미를 선택했다. render 는 주어진 예문의 render… in(to)… 말고도 render… as… 로 쓸 수 있는데, 그 용법이 약간 다르다. 예문을 보면 그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The Korean phrase can be rendered as ‘I love you.’
translate 는 물론 ‘번역하다’라는 의미다. 저자가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 ‘carry across’ 를 생각하고 일종의 시적인 허용 poetic license 을 발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render 가 예술 작품의 창작 행위와 관련해서 쓰일 때, ‘무엇을 표현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하지만 여기서 이 의미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구문 구조가 그러그러하고, 이 구문의 의미가 그러그러하기 때문이다. ‘삼다’에 ‘무엇을 무엇이 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나도 ‘시적인 허용’이란 걸 써보는 것이다.
그럼 두 절을 합쳐보자.
(그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 (그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가 부여/형성되었다.
->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부여한 것으로 그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혹은 그런 이해는 가능성일 뿐이다’라고
“기제품旣製品 [변기, 빗자루 등]의 선택은 심미적 즐거움/도락의 영향을 받아 내려진 선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심미안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각적인 무관심이 보이는 반응에 기초한 선택”이다.
뒤셩은 그 물건들을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이라고 여기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순전한 무관심 가운데 눈에
practical demonstrations 이하는 앞선 문장에 대한 추가 정보/설명이다. 여기서 쓰인 콜론 colon 의 의미가 그러하다.
beauty of a sort: 여기서 of a sort 는 ‘모종의, 일종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의미로 쓰려고 했으면 of some sort 라고 했을 것이다. of a sort 로 앞의 명사를 한정한다. 왠지 질이 좀 떨어지거나 수준 이하인 무엇을 형용해주는 말이다
in the least likely places: 이것은 분명 한 가지 의미로밖에 읽히지 않는데, 논쟁이 오간 내용을 보고 quot hominess, tot sententiae 라는 라틴어 문구가, 진부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진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문제의 텍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 명쾌한 문장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냥 대충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인 단토의 답장이다.
“
저자의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unedifying objects, exhibited in the least likely places for them to be.
One may find beauty of a sort (even) in the unedifying objects,
그럼 다음과 같은 문장을 한번 보자.
Often the best fish ar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좋은 물고기가 잡히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는 말이다. 좋은 물고기가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지 않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심미적 대상, 즉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란 게 있으리라고 기대되지 않는 화장실, 부엌, 길거리, 상점 (the least likely places) 등, 이런 곳에서 발견하는 물건도 심미적인 거리가 부여(미술관 전시)되면, 심미적 대상
다만 of a sort 가 있어서 완전히 깔끔한 읽기 reading 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변기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 in the least likely places, 즉 미술관의 전시장에 전시물로 전시됨으로써, 이 변기가 미술품이 된다는 의미로 그렇게 썼다는 것이 단토의 말이다.
어쨌든 미술 전시장에서는 고품격 미술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미술품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기대하는 것은
전혀 뜻밖인 곳에서 격이 떨어지는 미美가 발견될 수 있다는 실제적인 증거.
->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좀 모자라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단순히 이론이 아닌) 실제적 증거다.
(그러나 practical을 virtual, almost 의 의미로 다시 보고 다음과 같이 옮겨본다. 시범/입증에는 본질적으로 실제적인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practical 의 의미를 가볍게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 아름다움은, 격이 좀 떨어지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즉, 뒤셩은 그런 것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위의 결과가 그것을 입증한 셈이 되었다는 의미다.)
모두 종합해보자.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부여한 것으로써 그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가능하다. 아름다움은, 격이 좀 떨어지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 그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이것은 가능성일 뿐이다). [뒤셩이]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심미적 도락의비정상적인, 심미적 도락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부여했다.부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아름다움은,아름다움이,격이격은 좀 떨어지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찾을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단토가 훌륭한 철학과 비평안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단토는 스스로 “대중 일반에게 시각 예술과 그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주된 역할”이라고 한다. 단토는 “심미적 즐거움은 위험한 것이며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한 예술품을 놓고 그것을 말로 설명하고, 이해하고, 이 말을 통해서 정신적인 함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시각 예술을 보고, 말을 통해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평범한 일반인을
단토는 그의 편지에서 심미적 거리를 설명하며 E. Ballough 를 언급한다
앞선 포스트(01-18-09)에서 사상의 코드화 얘기를 했고, 다른 포스트(01-20-09)에서는 히니 Seamus Heaney 의 예술관을 들먹거렸다. 단토의 사상이 훌륭할지는 모르지만, 즉 히니의 말을 빌자면, 예藝는 있을지 모르지만 예를 푸는 술術(착상을 정교한 기호로 변환해주는 기술)이 그만 못하다는 인상이다. 아니면, 저자의 사상思想, 활자로 코드화되기 전, 머릿속에 무형으로 운행하던 착상의 무리 자체에 질서와 명확함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경우에는 아무리 술術이 뛰어나도 명쾌한 사상이 담기지 못하니까. 그러나 이것은 단편을 통한 인상일 뿐이며 그의 글을 더 읽으면 그 부정적인 인상이 지워질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철학자, 사상가일수록 그들의 글이 명쾌하다. 특정 개념이 심원하여 어려울 수는 있을지언정 구문과 글결은 명쾌하고 정치精緻하다. 인문 계통의 저자들에게서보다, 훌륭한 수학자나 과학자들 가운데서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발견할 확률이 더 높다. 자신의 사상을 책으로 써서 내는 것은, 소통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런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누구를 탓해야 할까?
독자에게그 책임 소재가 있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정밀 독해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경우, 많은 것을 놓치거나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근래, 개인 컴퓨터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정보의 교환이 쉬워졌고 그 양은 넘쳐난다. 이 모든 것을 소화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때문인지 많은 양의 정보를 섭취한다. 학교에서도 수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대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속독을 할 필요가 있다. 또 속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학생, 학자들의 현실이다. 정밀 독해는 점점 실종되어 가고 있다. 심지어는 학교에서조차도 그렇다. 많은 양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의 텍스트를 번역한 분을 탓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분도 정밀 독해가 실종된 교육의 산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저 시간에 내몰려 성의 없는 번역이 되었을 수도 있다. 사회와 학원의 일반적인 환경이 그렇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다. 단정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은 책을 번역하느라 애를 썼을 것 같다. 한두 문장에 돋보기를 들이대어서 이 정도 비판을 받지 않을 번역서는, 특히 인문 교양서는 별로 없으리라고 짐작한다. 나는 번역서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문제의 텍스트 말고, 나머지를 충분히 고려해보면, 긍정적인 면도 있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재미있는 텍스트를 번역해도 번역 작업은 고되다. 이 일의 본질이 그렇다. 육체적으로 상당한 지구력을 요할 뿐더러, 정신적인 노동의 양과 시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적인 보상이 이에 값하지 못한다.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실한 번역에 대한 번역자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른 생계 수단이 있고, 충실한 번역을 할 시간적인 여건이 되지 않으면 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가 그 번역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핀잔이다. 이 문제의 텍스트는 번역자의 실력을 가늠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논쟁이 아름답게 끝나지 않았다고 앞서 언급했다.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 이해를 구하는 것은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편지 내용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언급하고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는 행위는 아름답지 못하다. 이상적인 방법은, 번역자가 그 부분에 대한 자신의 번역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이겠고, 실수를 깨달을 경우, 실수였다고 인정하는 것일 게다. 자신의 번역이 옳다고 생각되지만, 그에 대한 비평이 여전히 존재할 경우, 역자 자신이 원저자의 의견을 받아 끝을 내는 것이 옳다. 독자가 직접 원저자를 접촉하기로 하면, 개인적인 탐구 차원에서 임해야 할 것이다.
활자 전문의 전당에 걸린 간판만 보고 활자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도 경계할 일이지만, 어떤 활자에 문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 간판마저 송두리째 폐물 처리하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학업의 공력工力이 그러하다. 가벼이 볼 수 없는, 땀이 배인 시간의 산물인 까닭이다. 간판이 내세우는 내용에 값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지만 그것은 어느 면을 보느냐에
나도 번역비평을 두고 지속적인 고찰을 하고 있지만, 번역비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라는 것 자체가 단순하지 않은 데다, 오역을 분별해내는 것은 비평의 한 작은 부분에 속하고,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수많은 양상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
번역비평에서 불명확한 텍스트를 생각하는 과정에 단토의 텍스트를 끌어다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내가 이 포스트에서 행한 것은 사실 비평이라고 볼 수 없다. 전체 텍스트가 아닌 데다가 어의와 구문 분석 parse 에 그쳤기 때문이다. 초보적인 것이다. 전체를 보고, 전체의 특성에 비추어 일관성 있는 기준으로 세목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다. 불명확한 텍스트는, 특히 이것이 오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사실 김새는 일이다. 더구나 첫장부터 그런 것이 발견되면 나머지는 읽고 싶지 않게 된다. 이렇게 오역으로 의심되는 부분을 논하고자 하면,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비평자의 의견을 개진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이것은 내가 여기서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인데—대상이 되는 번역 텍스트를 분석하며 번역자가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실수했는지 추론해보는 과정도 자세히 보여주어야 한다. 번역비평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공정하고 균형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번역비평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번역자로서의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함이고 내 자신의 번역을 돌아보는 도구를 갖추기 위함이다.
아무튼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의 발생 요인이 원작 텍스트에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Tuesday, January 20, 2009
번역비평 (8) 불명확한 번역
훌륭한 착상을 효과적이고 정교한 기호로 변환해주는 기술, 훌륭한 사상을 훌륭한 글로 나타내는 재능은
히니는 craft 와 technique 을 구별해서 설명한다—이 말들을 각각 기술技術과 기예技藝로 번역해서 써도—미흡하지만—큰 지장은 없을 듯하다.
기술은 다른 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은 제작 솜씨다 Craft is the skill of making .... 기술은 정감情感이나 자아自我 the self 에 구애받지 않고 동원될 수 있다. 시의 기술을 배우는 것은, 시라는 우물의 도르래 쓰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대개 두레박을 절반쯤 내리고 공기만이 든 빈 두레박을 감아올리는 연습에서 시작한다. 진짜 물을 긷는 시늉만 하다가 어느 날 감아올리는 두레박이 불현듯 팽팽해짐을 느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레박이 우물물에 담가진 것이다. 이때부터 우물물은 두레박을 내리는 사람에게 계속 손짓을 한다. 자신의 내면 우물물의 수면이 깨짐이 그러하다.
기예는 두레박이 깊은 우물물의 수면을 깨뜨리고 들어가 처음으로 물을 길어낸 다음에야 비로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기예는 낱말을 동원하는 방법, 운율과 글결 verbal texture 을 다룰 줄 아는 방법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즉, 기술도 동원되지만] 시인의 인생관을 명확히 하고 또 자신만의 실재를 명확히 함 a definition 을 포함한다. 정상적인 인식의 경계선을 넘어가서, 분명하지 않은 영역 the inarticulate [말로써 분명히 포착되지 않은 영역]에 침범함을 포함한다. 기억과 경험의 영역에서 정감의 근원이 되는 것들과, 이것들을 예술작품으로 표현하는 형식에 관련된 전략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동적 기민함 a dynamic alertness 을 포함한다.
- Seamus Heaney, Preoccupations: Selected Prose 1968-1978 (The Noonday Press, 1980), p. 47.
또한 히니는 화폐를 비유로 삼아 기예를 설명하기도 한다. 기예는 화폐에 은화隱畵를 집어넣는 것watermarking 과 같다고 한다. 인식과 목소리와 생각을 이루는 본질적인 무늬를 은선隱線의 감촉과 결로 바꾸는 것이라고 한다. 경험의 의미를 형식의 관할권 내로 불러들이기 위하여 마음과 몸[이지와 감각]의 자원이 함께 동원되는 총체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이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W. B. 예이츠의 말은 히니의 말과 공명하는 바가 있다.
기예에 숙달하는 것은 젊은 시인의 의무다. 그런 후에야 인생 체험이 깊어졌을 때 시가 기댈 수 있는 기예의 자원이 갖추지는 것이며, 정감의 조화를 나타내는 심미적인 형식의 완성을 성취할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것이다. (W. B. 예이츠)
- Helen Vendler, Our Secret Discipline: Yeats and Lyric Form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p. 2.
기술과 기예에 관한 히니의 생각은 앞으로 생각할 불명확한 텍스트를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말을 염두에 두고 다음 포스트에서는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번역에 좀더 밀착해서 파고들 생각이다.
Monday, January 19, 2009
번역비평 (7)
비록 사적인 블로그이지만 이 번역 비평의 당위성을 점검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번역비평은 번역의 이론과 실제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라는 피터 뉴마크의 말을 앞선 포스트에서 언급했다. 이 말은 번역비평이 없으면 이론과 실제가 따로 논다는 말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리 전개를 끝까지 추적해가면 그 결과는 결코 번역 일반에 호의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창하게 내다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작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번역비평은 "재미있고 유익한 훈련"이라는 그의 말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이 블로그의 당위성을 찾아 확인하고 계속 나아가겠다. 이것을 빨리 끝내고 원래 의도했던 번역이론과 실제에 들어가야겠다.
앞선 포스트(6)에서 코드화니 해독이니 하는, 모처럼 딱딱한 말들을 써봤다. 명확하지 않은 텍스트를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번역본을 읽을 때 흔히 대하게 되는 불명확한 텍스트와 생경한 언어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시간이 없는 고로, 다음 포스트에서 생각해야겠다.
Sunday, January 18, 2009
번역비평 (6) 번역본 평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번역자다. 일상생활에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일상의 번역자들 가운데 활자로 변환해놓은 자신의 코드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소수의 무리가 있는데 이들을 작가라는 통칭으로 묶어서 분리한다. 이들이 코드화해놓은 활자를 읽는 독자들은 작가들의 사상, 코드화되기 전의 사상을 알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한다. 돈을 써가면서까지 독자 스스로 짊어지는 해독자로서의 의무다. 시간과 돈을 써가며 자원하면서도 해독자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고 뒷짐 지고 딴 짓 하는 독자도 있다. 아, 그러나 이 자리는 '생태학'을 논하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한눈팔지 말고 원래 하려던 얘기를 향해 나아가자.
작가가 시각적인 기호, 즉 활자로 변환해놓은 코드를 다른 활자로 바꾸어주는 일을 스스로 떠맡는 무리가 있다. 번역자 혹은 번역가로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뜻은 가상하지만 한편으론 가련하기도 하다. 영미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간혹 그냥 번역가라고 하지 않고 번역작가 translator writer 라고도 한다. (번역 얘기를 해가면서 영어문법이 필연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두 명사 중에 앞의 명사는 뒤의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 기능을 한다. 그러니까, 번역가이자 작가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번역작가라고 하는지는 이 글을 통해서, 아니 내 코드화의 결과를 통해서, 차차 드러나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번역자라는 명칭을 선택해서 쓰려고 한다. 원저자에 대하여 번역자라고 하는 것이 더 정합성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 즉 원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코드화한 활자를 다른 활자로 바꾸어주는 고된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번역자가 수행해야 할 의무는 이 코드를 해독하는 일이다. 번역자는 이 코드를 해독해서 원저자가 품었던 찬란한 신세계를 자신의 머릿속에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코드의 해독을 보다 친밀한 두 글자로 바꾸면? 독해. 그러나 번역자는 그냥 독해가 아니고 치열한 정밀 독해 작업조에 편입된다. 이 작업조에 편입되기를 거부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폐해는 실로 가볍지 않은 것이다. 다른 데 가서 딴 짓 하다가는 반역자가 되기 십상이다.
해독이 완전히 이루어진다고 해서 천사의 아리아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원저자가 거쳤던 코드화의 천로역정이 아직 남아 있는 까닭이다. 이때—translator writer 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고 앞서 암시했지만—요구되는 것이 원저자가 발휘한 코드화의 실력을 모방하여 동원하는 것이다. 원작의 시각적인 기호는 나무랄 데 없이 잘 해독해서 머릿속에 원저자가 본 신대륙이 그대로 펼쳐지지만 다른 시각적인 기호로 코드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원작의 언어가 모국어이면서 독해력은 뛰어나지만 외국어, 그 '다른 시각적인 기호'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반쪽인 것이다. 나머지 반쪽은 새로운 코드화 작업이다.
이 새로운 코드화 작업의 산물, 번역본을 읽을 때—
Thursday, January 15, 2009
번역비평 (5) 객관적 비평 기준
객관적인 기준은 자신(기준)에게 위배되는 텍스트를 만났을 때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지적해줄 뿐만 아니라, 잘못된 과정을 추적해서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필요시 이 설명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객관적인 실례를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부주의로 인한 실수였을 수도 있고, 텍스트의 활자를 잘못 읽은 탓일 수도 있고, 특정 분야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이밖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번역비평은 비평 대상이 되는 텍스트와 비평을 독자가 나란히 놓고 스스로 저울질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번역비평이 부정적인 비평이 될 경우—즉, 잘못된 점을 지적해야 할 경우—이에 대한 개선책 혹은 대안이 반드시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흠잡기 위한 비평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이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원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Reiss, 2000: 5)
Monday, January 12, 2009
번역비평 (4)
이 한계를 인정하고, 그래서 이것을 뛰어넘고자 한다면, 원서와 번역서를 비교하는 작업을 반드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비교 평가 작업에서 번역비평이 발생할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번역비평이 행해질 경우 최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객관성과 일관성은 이 일에 중요한 지침으로 언제나 작용할 것이다. 다음 포스트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가 이 기준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볼 것이다.
Sunday, January 11, 2009
번역비평 (3)
이제 [성경] 번역이 끝났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읽고 비판할 수 있다. 몇 페이지를 읽어도 읽어 나가는 데 걸림이 없다. 한때 큰 바위와 흙덩어리들이 있었던 곳을 걷기를 이제는 편평하게 갈아 놓은 판자 위를 걷듯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읽어 나간다. 사람들이 쉽게 걸어갈 수 있도록 바위와 흙덩어리를 치우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 했다. 밭을 깨끗이 고른 다음에 하는 쟁기질은 쉬운 법이다.
“밭을 깨끗이 고른 다음에 하는 쟁기질은 쉬운 법이다.” 루터의 말이다. 자신의 [성경] 번역(1530)을 가지고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비판한 비평가들에게 하던 말이다. 하지만 루터는 어쨌든 자신의 번역이 “비평의 대상이나 된다”는 사실에 만족해했다.
밭을 고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쟁기질을 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한다. 과문 탓인지 체계를 세워 쟁기질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밭을 고르는 사람이 체계적으로 밭을 고르는 일에 임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렇다는 말이다. 국외에 있으면서 인터넷에 의존한 리서치에 제한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이 블로그를 페이퍼로 삼아, 밭을 고르는 방법과 쟁기질하는 방법, 즉 번역과 번역 비평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체계를 얻기 위해 하는 생각이지만 그 과정은 산만한 수집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수집의 결과로 좋은 체계를 - 닫힌 체계가 아닌 열린 체계를 -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떤 사고의 체계든 출발점이 있고 이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일련의 가설이다. 가설의 세목은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은, 서양 학문 그 차제가 월등하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다. 번역에 있어서 오랜 세월 축적되어온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 기본적인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실이 한글과 대비해서 맞지 않을 수도 있으며 수정과 폐기가
먼저 번역 비평의 현주소를 한번 생각해보고 그 다음은 비평의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그런 다음 그 한계도 생각해볼 것이다. 위에 언급한 수집의 출발점으로 왼쪽 사이드 바에 참고 문헌을 열거해놓았다. 앞으로 이 리스트는 더 늘어날지 모르지만 일단은 내가 가까이 하는 책으로부터 출발한다.
서구에서도 번역 비평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번역서를 갖고 하는 서평을 보면, 대부분 지나가는 말로 “술술 읽히게 번역되었다 translated fluently”, “원서를 읽는 것 같다 reads like an original”, “아주 잘된 번역이다 excellent translation”, “원서에 가깝게 번역되었다 sensitively translated” 등 애매한 촌평에 그칠 뿐이지 촌평을 뒷받침해주는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번역서에 대한 서평을 하는 사람이 번역서와 원서를 대조해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원서 해독 능력이 있어도 마찬가지다(Reiss, 2000). 그나마 원서의 언어가 영어나 일본어일 경우에는 그래도 좀 들여다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외의 언어일 경우는 원서와 대조해보는 경우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Thursday, January 8, 2009
번역비평 (2)
번역 비평은 번역 이론과 실제 번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다. 번역 비평은 재미있고 유익한 훈련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번역을 비평할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번역 비평은 번역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격 요건 중의 하나다. (1) 번역가로서의 역량을 쉽게 향상시킬 수 있고, (2) 모국어와 외국어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 경우에 따라서는 주제 지식도 - 증가시킬 수 있고, (3) 취사선택의 범위를 - [어떤 방법으로 번역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서] - 보여주기때문에때문이다. 이것은 번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데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도움이 된다. - 피터 뉴마크 Peter Newmark
수집 assemblage 과정의 출발로 번역 비평 translation criticism 을 생각해볼 것이다. 이에 사용되는 자료로는 왼쪽 사이드 바에 밝혀 놓은 관련 저서들을 토대로 할 것이며 그 외의 자료가 불러들여질 때는 그때마다 언급을 할 것이다.
앞선 포스트에서 밝혔듯이 편견 없는 혹은 열린 수집을 - 즉 보잘 것 없지만 내가 세워 놓고 번역의 기준으로 삼았던 체계에 반대되는 내용이라도 포함시키며 - 백두 선생이 말하는 수집을 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수집 세목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그때 그때 사이드 바에 끄집어내어 추려 나가려 한다.
Monday, January 5, 2009
번역비평 (1) 수집과 정리, 그리고 체계
그런데 나름 공부해온 번역 이론을 정리해보기로 하고 방법론에 대해 궁리하다가 이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번역 이론과는
먼저 원문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번역을 단 다음 좀더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이 블로그에 올리는 번역은 항상 초고 상태로 올린다. 그런 뒤 다시 읽으며 눈에 띠는 것은 금을 긋고 수정했음을 표시한다.)
All systematic thought must start from presuppositions. (중략)
In all systematic thought, there is a tinge of pedantry. There is a putting aside of notions, of experiences, and of suggestions, with the prim excuse that of course we are not thinking of such things. System is important. It is necessary for the handling, for the utilization, and for the criticism of the thoughts which throng into our experience.
But before the work of systemization commences, there is a previous task - a very necessary task if we are to avoid the narrownesses inherent in all finite systems. (. . .) Philosophy can exclude nothing. Thus it should never start from systemization. Its primary stage can be termed assemblage. (중략)
In order to acquire learning, we must first shake ourselves free of it. We must grasp the topic in the rough, before we smooth it out and shape it. For example, the mentality of John Stuart Mill was limited by his peculiar education which gave him system before any enjoyment of the relevant experience. Thus his system were closed. We must be systematic; but we should keep our systems open. In other words, we should be sensitive to their limitations. There is always a vague beyond, waiting for penetration in respect to its detail.
모든 체계적인 사고는 가설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모든 체계적인 사고에는 지나치게 세목에 치중하는 현학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다. . . . 체계는 중요하다. 경험의 마당에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다루고 활용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체계화 작업에 앞서 먼저 해야 할 힘든 일이 있다.한정된 체계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모든 유한한 체계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편협성을 피하고자 한다면 필히 해야 할 일이다.철학에서는철학은 아무것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철학은 체계화하는데서 시작해서는작업부터 해서는 안 된다. 철학의 제1차적인 단계는 수집(+ 정리)이라고이름 지을부를 수 있다. (중략)
배움을 얻으려면 먼저 그것을 [그 배움을 = 우리가 배워 알고 있던 것을] 벗어 던져야 한다. 주어지는논제를담론의 대상을 다듬고 정리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먼저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한 예로, 존 스튜어트 밀의 사고방식은 그가 받은유별난독특한 교육에 의해제한되었다구속되었다. 이 유별난 교육으로 인해 그는 [교육 내용과] 관련된 경험을 [있는 그대로 = 날것으로] 받아들여 다루어보기 전에 체계부터갖추게 되었다갖추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체계는 닫힌 체계가 되었다. 우리는 체계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체계는 열린 체계여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체계의 한계에 민감해야 한다. 이 한계를 넘어선 곳에 우리의 의식에 [아직은] 분명히 잡히지 않은 그 무엇을 이루고 있는 세목[그 무엇을 이루는 개별적 정보 단위]이 항상 체계의 한계선을 침투해 들어오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다.
나는 번역을 하기 위해서 번역 이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론의 가치는 내가 하는 작업 자체, 작업 방법, 특정 방법의 선택에 대한 객관적인 반성(성찰/숙고)과 검증에 있다 하겠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반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론이 배제된 전적인 실용 교육만으로는 반성의 기능을 갖추기 힘든 것이다. 한편 번역의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중립적인 - 다소 중립적인 - 도구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도 이론일 것이다.
이 이론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백두 선생의 철학을 근간으로 해야겠다.
언어학, 번역 이론, 번역 비평으로 구분하여, 혹은 혼합하며, 수집하는 블로그가 될 것이다. 먼저는 결과를 바라보며 반성을 하기 위함이요, 그 다음은 반성의 결과를 딛고 나아가기 위함이다. 수집과 실험으로 형성되는 체계가 없으면 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믿는다. 열려 있기 위해서 공개적인 블로그는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몇 안 되겠지만 혹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아 주는 독자가 보정 역할을 해주며 닫힌 체계가 되지 않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