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가 그의 책을 번역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때 나는 미구엘 안젤 아스투리아스의 “바나나 3부작”으로 짬이 없었다. 코르타사르는 가보[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애칭]에게 기다리라고 했고, 그는 기다렸으며, 이 일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못 만족해했다.
그렇게 해서 <돌차기 놀이>는 내게 있어서, 水路學적인 상투적 표현으로, 분수령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이 방향을 바꾸어 그 길을 따른 까닭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없었지만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고 샘플로서 제일 첫 챕터와 뒷부분의 한 챕터 (어떤 챕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두 챕터를 번역했다. 편집자인 사라 블랙번과 훌리오, 두 사람 모두 내 번역을 좋아했고 나는 그 길로 바로 번역에 착수했다.
나와 훌리오가 이 소설에 끌렸던 것은 재즈, 유머, 자유진보주의적인 정치관, 창의적인 예술과 문학 등 그와 내가 공유했던 다채로운 관심사 때문이었다. 내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번역을 하면서야 비로소 이 소설을 완독했다.
이 특이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절차는 어찌된 것인지 이 책 자체의 특징과 부합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어떤 점에서도 번역에 지장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것이 성공적인 번역에 키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코르타사르는 그의 책을 세 편으로 나누었다.
저 쪽으로부터, “이 쪽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쪽으로부터”로 나뉘는데 마지막 편은 “없어도 좋은 챕터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는 이 소설이 여러 권의 책으로 - 무엇보다 우선 두 권으로 -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안내를 해준다.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되 제2편의 끝까지 읽고 나서는 멈추고 제3편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안내한 다음 그는 세 편의 각 챕터들을 다른 순서로 뒤섞어 배열한 안내표를 제시하여 다르게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각 챕터마다 그 끝에는 다음에 읽을 챕터의 번호가 붙어 있는 방식이다. 하지만 제일 마지막 챕터인 131번 챕터는 58번 챕터로 가라고 하는데, 이 챕터는 바로 전에 읽었던 챕터이며 131번 챕터로 가라고 한다.
이 구도는 결국 튀는 음반의 효과를 낸다. 바늘은 계속 뒤로 도로 튀고 또 이것이 반복되면서 노래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 방식에 따라 읽으면 소설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을 처음으로 대하며 정식으로 - 표면적으로는 - 읽을 경우에는 “....... 자신을 놓아 버리고, 팍, 그리고 끝.”이라는 말로 주인공 올리베이라가 창밖으로 몸을 던졌음을 암시하면서 소설은 끝나는 것 같다.
한 완고한 평론가는 그 소설을 두 번 읽도록 종용되는 것에 분노를 표했다. 훌리오는 내게 편지를 해서 그 가련한 얼간이는 자기가 우롱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에 수사학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사람들에게 그가 쓴 소설을 두 번씩은커녕 한 번이라도 읽어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라면서 절대로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번역을 완료했을 때 나는 이 책 처음의 설명이 생각났으며 내가 단순히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제일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침없이 헤치고 나옴으로써 이 소설의 세 번째 독법을 제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둔한 평론가가 깨닫지 못한 것은 <돌차기 놀이>가 하나의 게임이며 플레이할 그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훌리오가 책의 서두에 대략 제시한 설명은 두말할 것 없이 아르헨티나에서 그 놀이를 노는 방식이다.
‘땅’이라고 명명한 네모 칸에서 시작하여 숫자를 따라가다가 ‘하늘’이라고 명명한 네모 칸까지 가는 놀이이다. 훌리오의 작품을 처녀 출판해준 동향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그의 지적인 장난기를 알아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들의 가난하고 문제가 많고 종종 음울한 출생지의 역사가 좀더 그들과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코르타사르는 또한 인류는 잘못 명명되었으며 호모 루덴스로 명명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돌차기 놀이>의 번역에서 낱말을 따라가는 나의 직관적인 방법이 아주 유용했다. 여러 가지 다채로운 챕터들에 담겨 있는 흐름을 내가 그럭저럭 잡아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훌리오는 항상 각 작중 인물마다 다른 대화와 독백 방식을 부여했다.
그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와 혼잣말을 할 때 각각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음을 깊이 예리하게 인식했다. 어떤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그러한 불일치를 완전히 다른 어휘로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어미의 격 변화로 처리했다.
코르타사르를 읽을 때 독자는 그가 그런 기교를 부리는 경향이 있음을 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어떤 챕터에서는 간혹 그의 화자이기도 하고 분신이기도 한 올리베이라로 하여금 그가 라 마가의 방에서 집어 든 책 한 권을 보게 한다.
첫 번째 줄은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줄거리가 되는 시대와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줄, “그리고 그녀가 읽는 것들은, 서투른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코르타사르가 주인공 올리베이라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그가 작중에서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을 한 줄씩 번갈아 가면서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올리베이라가 사용하는 말이 갈도스의 말에, 또 그 역으로도, 영향을 주지 않도록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다뤄야했다.
이 혼합은 여러 번 유네스코의 공문서와 같은 것들이 포함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코르타사르는 유네스코에서 번역가로 일했던 적이 있다. 이 사실 때문에 번역에 정통한 사람의 면밀한 검사에 놓이게 된다는 불안감으로 떨기보다 나는 오히려 내가 어떤 어려운 일에 직면하여 있는지 훌리오도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미상불 그는 경우에 따라서 오직 번역가만이 해줄 수 있는 제안을 해주곤 했다. 따라서 그가 소설에 양념으로 사용한 공문서 부분의 번역에 이르렀을 때, 나도 그가 먹고 살기 위해서 했던 일을 그대로 하게 되었다. 즉, 보고서들을 충실하게 번역하되 그것들이 서로 좀 일치되도록 손을 보려는 유혹을 물리치며 번역을 한 것이다.
<돌차기 놀이>의 첫 부분과 “없어도 좋은 챕터들”의 일부분,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서술 에서 불어가 상당히 많이 엮어져 있다. 이 부분의 불어를 영어로 번역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훌리오가 그 부분들이 영어로 번역되기를 원했다면 소설을 쓸 때 처음부터 그 부분들을 불어가 아닌 서반아어로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영어권 독자들을 위하여 그 책을 쉽게 씀으로써 그들을 모욕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나는 어떤 경우에는 다른 여러 이유 때문에 서반아어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표기했다. 다른 노래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탱고는 오리지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 때로는 정말 웃기는 - 손상이 가해지기도 한다. 오페라 애호가인 나의 아버지가 오리지널인 이탈리아어 대신 영어로 바꾸어 부른 어떤 공연에서 들은 어떤 敍唱 부분을 인용하면서 오페라 번역이라는 어리석음을 놓고 조용히 웃으시던 일이 기억난다.
(. . .)
나의 첫 번역이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작품이었으며, 이것을 번역하게 됨으로써 나는 그 다음에 번역하게 될 다른 작품들을 번역하기에 적절한 마음가짐과 방식에 연동하게 되었다. (. . .) 하이드 씨가 지킬 박사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닮아가기 시작했지만 그림자만을 투영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의 언어로 움직였기 때문에 둘이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훌리오보다 먼저 <돌차기 놀이>를 생각하게 되었어도 그 작품을 쓸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훌리오가 승인하고 좋아한 영어 번역으로 그 작품을 살려냈다. 이제 90세를 바라보는 인생을 살아오며 낱말들이 시들어가고 또 다시 희미하게 빛을 발하면서 새로운 의미와 뉘앙스를 띠게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래의 언젠가 다른 누가 내 뒤를 밟으며 훌리오의 작품을 다시 번역해낼까 하는 자문을 해본다. 이 일은 끝없이 계속 진행될 수 있다.
왜냐하면 번역이란 절대로 완료되는 법이 없는 야릇한 점진적이고 진행형적인 문예상의 장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Trans. G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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