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31, 2009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돌차기 놀이 (Hopscotch)>는 내가 (45세 때에) 번역에 첫발을 디디게 한 책이었고 이 번역으로 나는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번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가 그의 책을 번역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때 나는 미구엘 안젤 아스투리아스의 “바나나 3부작”으로 짬이 없었다. 코르타사르는 가보[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애칭]에게 기다리라고 했고, 그는 기다렸으며, 이 일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못 만족해했다.

그렇게 해서 <돌차기 놀이>는 내게 있어서, 水路學적인 상투적 표현으로, 분수령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이 방향을 바꾸어 그 길을 따른 까닭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없었지만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고 샘플로서 제일 첫 챕터와 뒷부분의 한 챕터 (어떤 챕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두 챕터를 번역했다. 편집자인 사라 블랙번과 훌리오, 두 사람 모두 내 번역을 좋아했고 나는 그 길로 바로 번역에 착수했다.

나와 훌리오가 이 소설에 끌렸던 것은 재즈, 유머, 자유진보주의적인 정치관, 창의적인 예술과 문학 등 그와 내가 공유했던 다채로운 관심사 때문이었다. 내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번역을 하면서야 비로소 이 소설을 완독했다.

이 특이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절차는 어찌된 것인지 이 책 자체의 특징과 부합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어떤 점에서도 번역에 지장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것이 성공적인 번역에 키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코르타사르는 그의 책을 세 편으로 나누었다. 저 쪽으로부터, “이 쪽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쪽으로부터”로 나뉘는데 마지막 편은 “없어도 좋은 챕터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는 이 소설이 여러 권의 책으로 - 무엇보다 우선 두 권으로 -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안내를 해준다.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되 제2편의 끝까지 읽고 나서는 멈추고 제3편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안내한 다음 그는 세 편의 각 챕터들을 다른 순서로 뒤섞어 배열한 안내표를 제시하여 다르게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각 챕터마다 그 끝에는 다음에 읽을 챕터의 번호가 붙어 있는 방식이다. 하지만 제일 마지막 챕터인 131번 챕터는 58번 챕터로 가라고 하는데, 이 챕터는 바로 전에 읽었던 챕터이며 131번 챕터로 가라고 한다.

이 구도는 결국 튀는 음반의 효과를 낸다. 바늘은 계속 뒤로 도로 튀고 또 이것이 반복되면서 노래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 방식에 따라 읽으면 소설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을 처음으로 대하며 정식으로 - 표면적으로는 - 읽을 경우에는 “....... 자신을 놓아 버리고, 팍, 그리고 끝.”이라는 말로 주인공 올리베이라가 창밖으로 몸을 던졌음을 암시하면서 소설은 끝나는 것 같다.

한 완고한 평론가는 그 소설을 두 번 읽도록 종용되는 것에 분노를 표했다. 훌리오는 내게 편지를 해서 그 가련한 얼간이는 자기가 우롱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에 수사학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사람들에게 그가 쓴 소설을 두 번씩은커녕 한 번이라도 읽어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라면서 절대로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번역을 완료했을 때 나는 이 책 처음의 설명이 생각났으며 내가 단순히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제일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침없이 헤치고 나옴으로써 이 소설의 세 번째 독법을 제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둔한 평론가가 깨닫지 못한 것은 <돌차기 놀이>가 하나의 게임이며 플레이할 그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훌리오가 책의 서두에 대략 제시한 설명은 두말할 것 없이 아르헨티나에서 그 놀이를 노는 방식이다.

‘땅’이라고 명명한 네모 칸에서 시작하여 숫자를 따라가다가 ‘하늘’이라고 명명한 네모 칸까지 가는 놀이이다. 훌리오의 작품을 처녀 출판해준 동향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그의 지적인 장난기를 알아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들의 가난하고 문제가 많고 종종 음울한 출생지의 역사가 좀더 그들과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코르타사르는 또한 인류는 잘못 명명되었으며 호모 루덴스로 명명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돌차기 놀이>의 번역에서 낱말을 따라가는 나의 직관적인 방법이 아주 유용했다. 여러 가지 다채로운 챕터들에 담겨 있는 흐름을 내가 그럭저럭 잡아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훌리오는 항상 각 작중 인물마다 다른 대화와 독백 방식을 부여했다.

그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와 혼잣말을 할 때 각각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음을 깊이 예리하게 인식했다. 어떤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그러한 불일치를 완전히 다른 어휘로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어미의 격 변화로 처리했다.

코르타사르를 읽을 때 독자는 그가 그런 기교를 부리는 경향이 있음을 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어떤 챕터에서는 간혹 그의 화자이기도 하고 분신이기도 한 올리베이라로 하여금 그가 라 마가의 방에서 집어 든 책 한 권을 보게 한다.

첫 번째 줄은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줄거리가 되는 시대와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줄, “그리고 그녀가 읽는 것들은, 서투른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코르타사르가 주인공 올리베이라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그가 작중에서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을 한 줄씩 번갈아 가면서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올리베이라가 사용하는 말이 갈도스의 말에, 또 그 역으로도, 영향을 주지 않도록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다뤄야했다.

이 혼합은 여러 번 유네스코의 공문서와 같은 것들이 포함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코르타사르는 유네스코에서 번역가로 일했던 적이 있다. 이 사실 때문에 번역에 정통한 사람의 면밀한 검사에 놓이게 된다는 불안감으로 떨기보다 나는 오히려 내가 어떤 어려운 일에 직면하여 있는지 훌리오도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미상불 그는 경우에 따라서 오직 번역가만이 해줄 수 있는 제안을 해주곤 했다. 따라서 그가 소설에 양념으로 사용한 공문서 부분의 번역에 이르렀을 때, 나도 그가 먹고 살기 위해서 했던 일을 그대로 하게 되었다. 즉, 보고서들을 충실하게 번역하되 그것들이 서로 좀 일치되도록 손을 보려는 유혹을 물리치며 번역을 한 것이다.

<돌차기 놀이>의 첫 부분과 “없어도 좋은 챕터들”의 일부분,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서술 에서 불어가 상당히 많이 엮어져 있다. 이 부분의 불어를 영어로 번역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훌리오가 그 부분들이 영어로 번역되기를 원했다면 소설을 쓸 때 처음부터 그 부분들을 불어가 아닌 서반아어로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영어권 독자들을 위하여 그 책을 쉽게 씀으로써 그들을 모욕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나는 어떤 경우에는 다른 여러 이유 때문에 서반아어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표기했다. 다른 노래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탱고는 오리지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 때로는 정말 웃기는 - 손상이 가해지기도 한다. 오페라 애호가인 나의 아버지가 오리지널인 이탈리아어 대신 영어로 바꾸어 부른 어떤 공연에서 들은 어떤 敍唱 부분을 인용하면서 오페라 번역이라는 어리석음을 놓고 조용히 웃으시던 일이 기억난다.

(. . .)

나의 첫 번역이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작품이었으며, 이것을 번역하게 됨으로써 나는 그 다음에 번역하게 될 다른 작품들을 번역하기에 적절한 마음가짐과 방식에 연동하게 되었다. (. . .) 하이드 씨가 지킬 박사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닮아가기 시작했지만 그림자만을 투영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의 언어로 움직였기 때문에 둘이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훌리오보다 먼저 <돌차기 놀이>를 생각하게 되었어도 그 작품을 쓸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훌리오가 승인하고 좋아한 영어 번역으로 그 작품을 살려냈다. 이제 90세를 바라보는 인생을 살아오며 낱말들이 시들어가고 또 다시 희미하게 빛을 발하면서 새로운 의미와 뉘앙스를 띠게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래의 언젠가 다른 누가 내 뒤를 밟으며 훌리오의 작품을 다시 번역해낼까 하는 자문을 해본다. 이 일은 끝없이 계속 진행될 수 있다.

왜냐하면 번역이란 절대로 완료되는 법이 없는 야릇한 점진적이고 진행형적인 문예상의 장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Trans. Gene

Monday, March 30, 2009

Text (1)

의도적으로 비非텍스트non-text를 창작에 사용하는 시인이나 산문 작가들의 작품은 차치하고, 실제 생활에서 비텍스트에 가장 근접한 것은 어린아이의 말과 좋지 않은 번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 Halliday and Hasan in Mona Baker, In Other Words (Routeledge, 1992), p. 111
Trans. Gene

Monday, March 16, 2009

문예 번역 (8)

번역을 수용하는 문화에 응하기 위해 번역을 수정하는 의식적 수정 결정이 뒤따를 수 있다. 이것은 편집자와 번역자의 공동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작 내용의 일부를 빼는 수도 있다.

많은 출판사들이 원작 언어를 아는 편집자를 고용하지 않는 것도 지적해둘 만하다. 원작의 영향을 받지 않고 편집에 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번역은 상당한 창의력을 요하는 노력의 결실이다. 번역자는 번역이라는 내성적 활동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서로 얽힌 사회적, 문화적 요소와 관련하여 그 어떤 제약이 있더라도 기존 문학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결국 문예 번역자인 것이다. (피터 부시)

- 이상 Routledge Encyclopedia of Translation Studies (2008: 127-130) 에서 추려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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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March 15, 2009

문예 번역 (7)

텍스트의 종류에 따라 다른 번역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단시短詩를 번역할 때와 장편 소설을 번역할 때의 접근 방법이 같을 수 없다. 소설을 번역할 때는 수 백 페이지에 이를 수 있는 작품의 전개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다른 운율, 비유, 상징을 다루어야 한다. 다독과 리서치를 통해 그런 것들의 유형을 식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들은 창의적으로 고쳐 쓰는 과정에 예속되어 잠재의식에 의해 번역에 반영되기도 한다.

모호한 표현과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로 가득한 제임스 조이스의 촘촘한 텍스트를 번역할 때는 조이스가 자국의 표준 언어와 기존 관념을 뒤흔들었듯이 번역어의 문화를 뒤흔들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문예 번역은 사회와 문화에 얽힌 작업이며 번역자는 상이한 두 문화의 중간에 위치하며 이곳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상호 작용에 열쇠의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는 벤야민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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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March 14, 2009

문예 번역 (6)

텍스트를 세심하게 읽고 또 읽으면서 해당 텍스트에 대한 리서치와 저자의 다른 작품에 대한 리서치를 하는 것은 번역에 필수적인 준비 작업이다. 저자가 사는 나라에 가보는 것도 있을 수 있겠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리서치도 있을 수 있다 [-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특히 한국의 경우, 비현실적일 것이다.]

자국의 저자가 쓴 책 가운데 그와 비슷한 책이 있으면 참고로 읽어보는 것도 좋다. 번역가 펠스티너의 경우,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번역하는 데에 적절한 ‘목소리’를 가늠하기 위해 T. S. 엘리엇의 시를 읽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어느 기사에선가 읽었는데, 전문 번역가 정영목 씨가 한국 문학 작품을 읽어 한글 표현력을 키운다고 했던 것 같다.]

생존해 있는 저자의 작품을 번역할 경우, 저자와 번역자가 협력해서 번역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어떤 저자들은 기꺼이 번역에 적극 관여하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번역의 결과는 원작과 다른 새로운 작품이 되기도 한다. 원작에 새로운 것이 보태지는 것이다. 한편 어떤 저자들은 번역 텍스트에 코멘트를 하는 정도에 그친다.

또 한편 번역자 편에서 원저자의 관여에 일정한 선을 긋기도 한다. 원작에 너무 단단히 얽매이지 않는 번역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이런 방식은 번역자의 재량에 폭을 더해준다(Venuti). 번역할 작품에 대한 학문적인 리서치를 안 하기로 결정하는 번역자들도 있다. 좀더 창의적이고 직관적인 번역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번역 방법을 선택하든지 번역은 기본적으로 다독과 개고의 결과다. 다독과 개고는 최종 원고의 모양을 결정한다. 배경은 매우 중요하다. 번역, 출간의 전반적인 과정은 외부적인 요소들에 의해 끊기거나 변경될 수 있다. 어떤 책의 출간일은 영화의 개봉에 맞춰야 할 것이고 [또 어떤 책은] 경제나 정치 상황에 민감하게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Wednesday, March 11, 2009

문예 번역 (4)

(내가 완전히 전업 번역자가 아닌데 이런 글을 계속하려니 다소 낯간지럽다. 그러나 어쨌든 번역은 멋진 일이며, 심지어는 예술의 묘미마저 느낄 수 있는 분야임을 알기 때문에 기왕 하는 것 깊게 파고 싶은 마음이다. 번역이 순수한 창작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독서에 있다. 번역은 정밀 독서의 정화다. 결정체다. 다른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바로 번역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러한 측면 말고도 학문적인 측면에서 아직 개간해야 할 곳이 많으므로 또한 매력적이지만 여기에 모든 시간을 쏟을 수 없는 나로서는 좀 아쉬울 따름이다. 아무튼 이 블로그는 그냥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Motivation, 그렇다. 번역을 계속해야 하고 또 이런 블로그를 계속해야지, 동기 부여를 찾아야 한다. 어디서 찾지?)

나라별로 번역과 번역자가 처한 상황이 다를 것이다. 프랑스의 출판사 Actes-Sud 의 한 자회사는 일단의 문예 번역자들이 운영하며 번역서를 선정하고 외부 번역자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일을 총괄적으로 관장한다. 또한 외부 평가자들을 두고 번역 고려 대상 도서들에 대한 소견서를 의뢰하고 수집한다. 영국과 미국의 경우, 출판사들은 대개 프리랜스 번역자들에게 번역을 의뢰한다. 이 번역자들은 출판사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아는 사람을 통해 (누구의 친구가 번역을 하는데 괜찮게 한다더라 하는 식으로) 소개를 받아 일을 맡기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된 작품을 보고, 혹은 번역자 인명부를 찾아 의뢰를 한다.

번역자마다 번역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같은 번역자라도 번역하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현존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든 기존 번역본을 디딤돌로 삼아 고전을 재번역하든 번역자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단계와 문제점들이 있다. 과거에는 번역자들이 이런 단계와 문제점들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고 조지 스타이너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제는 번역자들이 그런 점들에 대한 많은 사례 연구를 남기고 있다.

(한국의 번역자들도 사례를 글로 남기는 일에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특히 번역 역사가 일천하고 지반이 약한 한국의 번역을 볼 때, 기록을 남기는 일에 정말 열심을 부려야 할 것이다. 그저 일반적인 이론서만 대충 어디서 뱉기거나 짜깁기해서 내지 말고, 직접 번역해가며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구체적인 사례로 많이 남기고 후학들이 이것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문학 번역서들을 보면―인문서 번역도 그렇지만―S대 영어 박사라고 혹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교편을 잡고 번역한다는 사람들의 번역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번역이 무성하다. 학생들에게 돈벌이를 시켜주기 위해 대신 하게 한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인문서의 경우는 내용의 효과적인 전달 내지는 작가의 문체 논의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문법과 어의 등 기초적인 문제에 대한 오역 시비나 거론되고 있느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Tuesday, March 10, 2009

문예 번역 (3)

문학 번역자는 출판계 내의 사회적 관행과 현금적인 측면의 관계 연쇄에 속해 있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받을 금액에 동의하고, 번역 저작권과 원고 마감일 등에 대한 협약을 해야 한다. 에이전트가 있는 원저자들과는 달리, 번역자들은 모두 단독으로 출판사와 협상을 한다. (한국의 경우는 원저자들도 에이전트가 없겠지만. 또 이하 한국의 경우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번역료는 인세에 대한 선급금의 형태로 일부 먼저 지급되기도 한다. 원저자와 번역자의 인세 비율은 5:5, 6:4, 6:6 등으로 책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번역자에게 지불되는 돈을 추가 비용이라고 보는 인색한 출판사는 인세에 대해 지불하는 선급금의 금액이 적거나 번역 인세를 적용하지 않고 글자 수(외국의 경우 1천자 당 얼마, 한국의 경우 원고지 매절 수당 얼마)를 계산하여 지불한다. 많은 번역자들은 출판사와 협의를 할 때 원고 분량에 따른 지불 방식보다 번역에 걸리는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애를 쓴다. 문학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이나 사단법인들의 문화 진흥 기금이 특정 출판사들에게 지급되기도 하는데 이런 돈은 출판사가 번역자를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정은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의 출판사들은 번역의 진흥을 위해 정부나 기업체 등의 문화 관련 조성기금을 얻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Monday, March 9, 2009

문예 번역 (2)

문학 번역자의 한 모델 - 두 나라 말을 하고 두 나라 문화에 침투해 있다. 따라서 통상적인 지도책에 나와 있지 않은 지역에 거한다. 그/녀는 부단히 변하는 동시대 문화 현실에 정통하다. 이 현실에서는 인위적인 정치적 경계선을 넘나드는 이동이 끊이지 않는다. 단일 언어문화라고 자임하는 앵글로색슨계의 사회체제에서 그런 부단한 변화와 이동은, 병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위협적인 상황으로 비친다. 문학 번역자들은 상이한 문화가 만나는 첨예한 지점에 위치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번역하기로 선정된 작품들, 선정되지 않았더라면 그 존재를 알지도 못할 작품들을 번역하기 때문이다. 흔히 번역자들은 번역할 작품들을 제시하거나 혹은 정기적으로 해외의 출판사들이나 에이전시가 자국의 출판사에 보내온 작품들을 대신 읽고 이에 대한 소견서를 쓰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렇게 해서 내리는 선택과 결정은 선정된 원작이 탄생한 문화에서 쓰이는 언어와 정서 특유의 진수임을 알리는 행위다. 선정된 원작이 전통적인 기준에서 벗어나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또한 그것은 선정된 작품이 번역되었을 때 시장성이 있음을 믿는 행위다. 그렇지만 어떤 문학 번역이든 민족주의적 규범을 깨기 마련이며 이것은 당연지사다. 번역 작품이 제아무리 번역 작업과 출판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자국에 흡수될지라도, 번역은 원작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독자들의 독서 공간에, 번역되지 않았더라면 한낮 의미 없는 암호에 불과했을 작품을 독자가 읽어 알 수 있도록 소개하기 때문이다. 문학 번역자는 자국 문화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작품의 창조자로서 언어와 문화의 변경에서 일한다. 이 변경에서 정체성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미국인”, “한국인”, “흑인”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꼬리표로 축소되지 않는다.

Sunday, March 8, 2009

문예 번역 (1)

문학 번역은 문학 번역자들이 하는 일이다. 하나마다 한 자명한 말이지만 문학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의 일환에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 번역은 사회와 문화 관습의 복잡한 망상조직의 중심에 있는 독창적인 주관적 활동이다. 번역자의 창의적이고 이지적이며 직관적인 글쓰기가 흔히 ‘번역’이라고 표현되는 껍데기뿐인 추상 개념에 묻혀서는 안 된다.

문학 번역자들은 문학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기성 체계와 야합하든지 이에 맞서 싸워야 한다. 대개 시, 희곡, 산문과 같은 순서로 얘기되는 ‘고高’ 문화가 있고 이와 반대편 ‘낮은’ 부문에서는 공상 과학 소설, 아동 소설, 통속 소설 순으로 내려간다. 이 같은 위계는 번역할 작품의 상대적인 가치와 난이도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에 반영된다. 그러한 분류는 문화 이론가들, 탈근대주의자들, 그리고 일부 번역학자들에게 비난을 받아왔다. 그들은 규범의 구성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사회계급, 성별, 국가, 그리고 인종의 편견을 통해 굴절된 가치 판단에 의해 영향을 받았는지 지적해왔다. 이런 비난들은 작가들이 다양한 독자들의 다양한 독서에 이익이 되기 위해 무엇을 썼는지에 대해 평가를 할 때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다. 왕 같은, 혹은 여왕 같은 저자들은 분산된 개별적인 독자층에 의해 폐위되고 다른 사람들로 대체되어왔다. 문학 번역자들의 일은 은연중에, 그리고 때론 노골적으로 그 규범의 권위, 문화의 국수주의, 저자들의 ‘죽음’에 이의를 제기한다.

(피터 부시)

Wednesday, March 4, 2009

월요일에 으스스 한기를 느끼면서 급기야 지독한 감기에 걸려 어제부터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음. 겨우내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나오다가 봄의 문턱에서 그만 단단히 고생하는데 자칫 원고 약속 날짜를 어기게 될지도 . . .

Thursday, February 26, 2009

문화의 차이에 따른 연어 관계의 변화

간혹 어떤 번역자들은 때론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의미의 정확함 혹은 번역자 자신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선택해서 번역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코 원작 텍스트에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재생해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느끼는 번역자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원작 텍스트:

KOLESTRAL-SUPER is ideal for all kinds of hair, especially for damaged, dry and brittle hair.

역逆번역 (위의 텍스트에 대한 아랍어 번역을 다시 영어로 옮김):
Kolestral-super is ideal for all kinds of hair, especially for the split-ends hair, harmed or damaged hair and also for hair which is dry, of weak structure or liable to breaking.

영어에서 hair 와 연어를 이루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dry, oily, damaged, permed, fine, flyaway, brittle 등등. 이들 연어들은 영어권 나라의 문화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말들이다. 대다수 영어권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가벼우며 잘 손상되는 축이다. 아랍어에서 ‘split-ends’, ‘dry’, ‘oily’, ‘coarse’, ‘smooth’ 등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 ‘hair’ 와 연어를 이룬다. 이 연어 관계는 아랍어권의 문화적인 현실을 반영한다. 아랍어에는 ‘damaged hair’‘brittle hair’ 와 유사한 구절이 없다. 그럼에도 위에 든 예문의 번역자는 원작 텍스트에 담겨 있는 의미의 모든 양상을 그대로 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원작 텍스트의 연어 구절들이 그대로 아랍어로 옮겨졌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번역을 했다. 아랍어 번역에서 표현된 부자연스러운 연어 구절과 길어진 설명은 아랍어 독자들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말들이다. 게다가 ‘damaged hair’‘brittle hair’ 같은 말들이 아랍의 일반인들에게 문제로서 비춰지는지도 의문이다. (Baker, 1992: 61)

그렇다면 예문의 광고 문안은 Kolestral-super is ideal for all kinds of hair, especially for the dry, split-ends hair. 정도로 번역되었으면 족하다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이것이 아랍인들에게 두발의 문제라고 인식되어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이 광고 문안이 설명하는 제품은 아예 처음부터 아랍인의 두발 미용과는 상관이 없든지, 있더라고 광고문안이 새로이 작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부터는 번역자의 소관을 넘어서는 문제일 것이다.

같은 예문을 한글로 번역한다면 콜레스트랄 수퍼는 모든 유형의 머리카락에 이상적이며 손상된 머리카락에 특히 좋습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머리카락은 굵어서 파마로 인해서 손상되거나 기름기가 빠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 손상되지 않는다. 백인의 머리카락은 대개 건조하고 가늘고 가벼워서 풀풀 날리며 동양인이나 흑인의 머리카락보다 잘 손상되는 축에 속한다.

번역을 함에 있어서 문화적인 차이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언어의 표면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임할 경우, 번역어 독자에게 생경하고 잘 와닿지 않는 번역이 될 소지가 많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문이다. 언어 외적인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에 관한 지식, 다루어지는 주제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Wednesday, February 25, 2009

정확함과 자연스러움 사이의 갈등 (2)

앞선 포스트에 대한 예를 하나 살펴보겠다. 정확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선택한 번역에 관한 것이다. 추가 설명을 보탬으로써 텍스트가 어수선하게 되거나 혹은 어색한 연어구를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만큼 의미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경우다.

원작 텍스트:
New Tradition offers a fascinating series of traditional patterns in miniature using rich jewel-like colours that glow against dark backgrounds.
(뉴 트러디션은 어두운 배경에서 빛을 발하는 선명한 보석 색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문양의 매혹적인 축소판 시리즈를 내어놓습니다.)

역逆번역 (위의 텍스트에 대한 아랍어 번역을 다시 영어로 옮김):
The ‘New Tradition’ collection presents a number of fascinating designs in a reduced size, in dazzling colours like the colours of gems, the glowing of which is enhanced by the dark backgrounds.
(뉴 트러디션 컬렉션은 다수의 매혹적인 디자인의 축소판을 보석 색 같은 눈부신 색상으로 선보입니다. 이 색상은 어두운 배경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Rich colours 는 선명하고 짙다. 아랍어의 연어 구절은 색의 농도보다는 밝은 정도를 나타낸다. (Baker, 1992: 57)

원작 텍스트에서 연어 관계를 이루는 구절에 대응하는 구절을 번역 텍스트에서 찾을 수 없을 때 내려야 하는 선택이다. 번역 텍스트가 쓸데없이 길어지거나 어수선하게 되더라도 설명하는 식의 번역을 해서 정확성에 치중할 것인지, 아니면 해당 구절의 의미를 충분히 살려주는 것이 문맥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으므로 번역어에 자연스러운 구절로 의미의 일부만 살려서 간결하게 처리해줄 것인지 판단해서 내릴 선택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내린 선택의 결과를 두고 부실 번역이나 오역 시비를 거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Monday, February 23, 2009

정확함과 자연스러움 사이의 갈등 (1)

(지리멸렬한 세태! 실패를 하더라도 좀더 폼나게 실패하기 위하여 오늘도 . . .
I will ever try. I may fail again. But I will fail better.)

번역자라면 누구든 번역을 할 때 원작 텍스트의 연어 관계를 깨지 않으면서 그 의미를 살리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 의미를 십분 살려 놓지는 못한다. 그 의미의 차이는 주어진 문맥 속에서 볼 때 아주 미세할 수도 있지만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영어의 ‘a good/bad law’ 는 보통 ‘a just/unjust law’ 로 번역된다. 이 의미의 차이가 중요하고 안 하고는, 주어진 텍스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이 ‘공정’에 초점을 두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또 한 예로 영어의 ‘hard drink’를 아랍어로 번역할 때 아랍어의 가장 가까운 말은 ‘alcoholic drinks’ 라는 연어를 이루는 말이다. 그런데 영어에서 ‘hard drink’는 위스키나 진과 같은 독한 술을 의미하며 맥주나 셰리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랍어에서 ‘alcoholic drinks’ 는 독한 술은 물론이고 맥주나 셰리 등 알코올을 함유하는 모든 음료를 가리킨다. 아랍어에서는 영어의 ‘hard drink’ 와 대등한 연어구連語句가 없다. 번역자가 ‘hard drink’를 전형적인 아랍어의 연어구로 옮기거나 혹은 그 의미를 분명히 살리기 위해서 연어 관계에 있지 않은 말을 사용하여 풀어서 번역한다든지 하는 결정은 원작 텍스트의 문맥에서 ‘hard drink’ 와 ‘soft drink’ 의 구분이 중요한지 아닌지 혹은 문맥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다.

어느 정도의 의미의 상실이나 보탬이 불가피한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언어마다 서로 구성 체계가 다른 까닭이다.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좀 달라질 경우, 이것을 받아들이고 말고의 여부는, 이 변화가 주어진 문맥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Baker, 1992: 56-57)

관련 언어에 대한 이해가 번역에 필수적인 전제 조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번역이론에 대한 개관과 이해도 균형 잡힌 번역을 위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도구다.

Saturday, February 21, 2009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 Samuel Beckett

Friday, February 20, 2009

그레고리 라밧사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번역자들에게 그가 한 말을 옮기지 말고, 그가 전달하고자 한 것을 옮기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이런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생각해볼 점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이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A drum! a drum! Macbeth doth come.

그런데 이 우렁찬 외침이 불어 번역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힘없이비실거린다.
Un tambour! un tambour! Macbeth vient.

번역자는 이런 부분에서는 이 부분에서 재량이나 창의성을 발휘했어야 했다. 셰익스피어가 전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그 정신을 살려주도록 말이다.

보르헤스가 한 말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점도 또한 생각해볼 수 있다. 베를렌이 바이올린의 구슬픈 소리를 모방해서 “Les sanglots longs des violons de l'automne."라는 문장을 썼다. 이 문장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비음을 가진 말이 - 트롬본 소리라면 모를까 - 영어에는 없다. 그럼 번역에서 악기 자체를 트롬본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이 편이 번역의 본질에 더 합당한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Sunday, February 15, 2009

그레고리 라밧사 (2)

독자의 경험은 독서에 영향을 미친다. 독자로서의 번역자도 예외일 수 없다. 사람들마다 모두 사람들은 저마다 특별히 좋아하는 말이 있다. 경험이나 환경, 환경이 서로 다르고 혹은 교육을 통한 선호가 또 교육의 영향으로 선호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 많이 사용된 특정한 낱말이나 표현을 표현이 너무 많이 쓰여서 고쳐 써야 할 때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어떤 분위기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내 자신의 경우, 월요일에 사용한 단어를 화요일에 다시 보고 마음에 안 들어 다른 단어로 바꾸었다가 수요일에 다시 원래 선택했던 단어로 되돌려놓기도 한다.

이 끊임없는 바꿈은 변경은 처녀귀신처럼 번역자들을 번역자에게 처녀귀신처럼 따라다닌다. 들러붙는다. 내 생각에 완성된 번역이란 없다. 일단 매듭지어 놓은 번역은 폐쇄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어 끊임없이 개고될 수 있다. 번역에 선택된 언어는 원저자의 언어만큼 확고하지 않은 까닭이다. 번역자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자는 자신이 선택한 번역어가 가장 좋은 선택인지 100%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번역해서 출간된 근사한 책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괴로운 심정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표지를 보면 마음이 흡족하지만 책을 펴서 읽어보면 첫 페이지부터 갈등이 일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번역하지 않고 저렇게 번역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갈등이다. 나는 내가 번역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지 않는다. 첫 페이지부터 그런 갈등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읽으면 너무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을지라도 내가 선택한 어휘나 표현에 대해 내 스스로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한 어휘나 표현 등이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느냐는 의문은 없어지지 않는다. 원작은 영원히 영광 속에 행진을 계속하지만 오래된 번역서는 자꾸 새롭게 번역해야 하는 번역되어야 할 필요가 바로 그런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Thursday, February 12, 2009

그레고리 라밧사 (1)

(그레고리 라밧사 Gregory Rabassa 의 이야기 중에서 생각해볼만한 부분들을 발췌해본다. 라밧사는 마르케즈의 Cien años de soledad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를 영역한 장본인으로 영어권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저명한 번역가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두고 마르케즈가 자신의 원작보다 마르케즈는 영어 번역 작품이 번역이 자신의 스페인어 원작보다 더 훌륭하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라밧사는 컬럼비아 대학 Columbia University 과 뉴욕 시립대학 CUNY, Queens College 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에 라밧사의 ‘백년 동안의 고독’ 번역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라밧사는 1970년 ‘백년 동안의 고독’에 대한 번역료를 인세로 받지 않고 글자 수(매절)로 받았다. 영역본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판매량은 극히 저조했다. 그런데 그러나 마르케즈가 1982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고 이 책의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급증하자 급증했으며 이로 인해 약간 배가 아팠었다는 얘기를 그의 라밧사의 회고록에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는 글은 그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글이 아니다. 회고록 If This Be Treason (2005) 에 나오는 글이 아니고 The Craft of Translation (1989) 에 나오는 글이다. 시간이 날 때 여기저기 흥미로운 부분만 조금씩 이 자리에 옮겨보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이 세상에 서로 똑같은 것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희망사항이고 희망사항일 뿐이고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산수교육 탓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엄격하게 엄밀하게 비교하고 따져보면 모든 것은, 생물이든 아니든 간에, 서로 아주 많이 닮았을지라도 개별적으로 철저하게 독특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알파벳의 첫 글자를 배우고 덧셈을 배우기 시작했고, 셈하는 것, 즉 2 +2 = 4 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고부터 줄곧 그와 같은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 셈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한다. 2 + 2에서 두 번째 2가 첫 번째 2보다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새롭기 때문에 2 + 2 = 4 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언어를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한 언어에 속한 단어가 다른 언어에서 등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실제로 요즘의 수학자들은 그들의 선배들보다 좀더 신중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취한다. ‘동일하다’라는 말 대신에 ‘접근한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빈번해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번역은 원작과 동일할 수 없고, 다만 원작에 접근할 뿐이다. 그리고 정확성과 관련하여, 번역의 우수성은 그 번역이 원작에 얼마나 가깝게 접근하고 있느냐에 의해 평가될 수밖에 없다.

Sunday, February 8,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5)

원저자가 이미 저세상 사람일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난센스 같은 글을 썼을 때는 번역 출판사의 질문들을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뉴욕의 한 출판사와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의 시선詩選을 번역했던 적이 있다. 그 출판사의 편집실에서 당황해 하며 내게 코멘트를 보내왔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요.’
‘그래요 말이 안 되죠. 모르겐슈타인은 난센스의 시인이었어요. 루이스 캐롤이나 에드워드 리어를 생각해보세요.’

나는 싱글 스페이스로 장장 5페이지에 걸친 편지로 - 번역된 전체 시보다 훨씬 더 길게 -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여전히 걱정하는 질문을 해왔다.

‘영어에는 이런 단어가 없는데요.’
‘맞아요, 없죠. 하지만 독어 원작의 이 단어는 독어에도 없는 단어예요.’

나는 모르겐슈타인에게 지원 사격을 청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했을 것이다. (모르겐슈타인은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매우 유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저세상 사람이니 그가 내 번역을 승인하겠지 하고 바랄밖에.

Friday, February 6, 2009

한국문학 번역의 과제들

이 블로그에서 신문 기사나 남의 글은 스크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이 기사만큼은 나중에 잊지 않고 다시 보기 위해 여기에 담아둠.

안선재(Brother Anthony) | 한국문학 번역가, 서강대 명예교수

한국인들은 흔히 한국문학이 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 출간된 작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1년 이후에 70편이 넘는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작품 수는 분명히 그보다 더 많다. 자주 듣는 또다른 말은, 한국문학의 번역은 형편없어서 노벨문학상 같은 것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첫번째 답변은, 최근에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있다는 것이다. 번역과 성공적인 마케팅은 노벨상을 타는 선행조건이 아니다. 두번째 답변은 지난 10년간 내가 봐온 한국문학 번역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충분히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상당히 괜찮다는 것이다. 세번째 답변은 노벨상 수여기관인 스웨덴 왕립아카데미 회원들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씌어진 문학작품을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명백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그들이 내린 판단은 대부분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동상이몽

그러나 한국문학의 번역과 홍보가 당면한 문제는 분명히 있다. 첫째, 번역될 작품을 선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의 문화, 정부 관계자들은 대개 이미지 선전으로써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려는 총제적인 캠페인의 일환으로, 널리 상찬되고 정평있는 '유명한' 한국작가들의 번역을 추진하려고 한다. 한국문학사를 가르치는 학계의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판단하기에 근대 한국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작품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늘날 해외의 상업출판업자들의 관심은 단 한가지에 집중된다. 즉 그들은 재정적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자기들의 위신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팔리는 작품을 출판하려고 한다. 한국측의 '문헌적 정보' 프로젝트와 '성공・수익'에 대한 외국 출판업자들의 요구 사이에는 직접적인 갈등이 있는데, 이 갈등은 런던이나 빠리, 뉴델리 등지에서 현재 어떤 종류의 문학작품이 잘 팔리는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문학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므로 전세계가 그 한국 작품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일은 없다. 최근에 나는 한 유명한 한국작가가 너무 많은 젊은 한국작가들이 1인칭 화자를 도입해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사실적인’ 스타일로 창작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세계문학으로 진출하려면 국제감각부터 익혀야

그의 비판은 (나는 그 논평의 전문을 보지 못했지만) 많은 한국문학 작품에서 서술자의 복합성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많은 한국 소설은 시작에서 출발해 간혹 회상이 섞여 들어가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어색한 결말로 끝맺는다. 외국의 성공적인 소설은 이렇게 창작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문학을 '세계화'하기를 바랄 때 한국이 당면한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오늘날 세계의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국 작가들과 독자에게 교육하는 것이다. 현재 번역과 출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 문학작품을 바깥에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동시대 외국의 탁월한 작가들을 한국독자에게 알리는 일이다. 전해지는 근래의 일본소설의 성공담은 그 점을 확인해준다.

많은 기성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을 현대인의 시청각매체에 대한 집착 탓으로 손쉽게 돌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독자들이 뭔가 더 나은, 진정으로 새롭고 즐거운, (최소한 때때로) 생각을 자극하는 그런 작품을 원한다는 사실의 징표이기도 하다. 양질의 현대 세계문학의 번역을 한국의 출판인들이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에 해가 되는 일이다.

외국독자들이 말하는 한국의 시와 소설

오늘날 세계에서 시는 대부분 잘 팔리지 않는다. 상을 타고 비평의 주목을 받으면서 수익을 내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시가 지난 20년간 한국소설보다 영어로 그렇게나 많이 출간되었는가? 나 자신만 해도 시집을 거의 20여권을 번역했지만 번역한 소설은 3권에 불과하다.

이 물음에 대한 한가지 답변은, 한국 시는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고 활기차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 시인들은 번역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특정한 한국적 삶의 경험에 대해 쓴다. 그들의 시는 살아 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독특하게 인간적이다. 물론 그 시적 효과를 위해 주로 한국어의 특징에 의존하는 시인들은 번역으로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외국독자들에게 어떤 한국 시들의 영향은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으레 이렇게 묻는다. "작품이 왜 이렇게 우울한가?" 시는 자주 고통스러운 상황에 복합적이며 개인적인 반응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목소리를 듣게 한다. 물론 소설은 시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한국 소설가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아한 문체, 다양한 서술 리듬, 해석의 모호함, 여러 서술자들의 목소리, 글쓰기 전략에서의 복합성 등은 모두 시로서의 소설이 갖는 근본적인 특성들인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체면치레하지 말고 치열하게 비판하라

물론 어느 면에서는 한국작가들이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효과적인 대화가 성숙되지 않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어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탓도 있다. 서평 형식으로 (때로는 맹렬하게) 표현되는 문학비평은 국제적인 문학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모든 작가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자기에게 너그러운 것이다. 사려깊고 도전적인 비평 없이 어떤 작가가 기량을 연마하고 약점을 고치고 성숙한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할 수 있겠는가? '체면'과 '명성'이 핵심 고려사항인 한국 같은 문화에서 정직한 비평은 자주 거부된다. 이건 큰일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창작되는 작품과의(반드시 북미나 유럽의 작품일 필요는 없다)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이 다시 태어나려면, 문단이나 학계의 '고참'들이 젊은 작가에 대해 후견인 노릇을 하고 평가하는 여전히 강력한 위계구조는 철폐하고,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자유를 찾아야만 한다. 그런 새로운 한국문학이라면 번역될 때 찬사를 받을 가능성이 휠씬 크다. 또한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핵심적인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7.5.15 ⓒ 안선재 2007

Thursday, February 5,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4)

한 번역자가 말했듯이 구글은 ‘번역자의 친구’다. 구글을 통해서 거의 언제나 번역자의 까치둥지 같은 머리가 필요로 하는 진기한 자료의 조각들을 찾아낼 수 있다. 나는 구글 검색을 통해서 카렌 두베의 Dies ist kein Leibeslied (This Is Not A Love Song)에 나오는 많은 밴드들과 그들의 노래 가사들을 캐내기도 했다.

카렌은 친절하게도 자신의 소설을 번역할 때 의문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카렌을 귀찮게 하지 않고 그럭저럭 이 소설에 나오는 관련 참고 자료들을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번역자마다 다른 방법을 취한다. 어떤 번역자들은 먼저 책을 통독하며 저자에게 질문할 사항을 추려낸다. 물론 이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저자가 생존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몇 년 전에 내가 번역한 E.T.A. 호프만의 Kater Murr (Tomcat Murr)는 몇 군데 주석註釋을 달 필요가 있었다. 펭귄 클래식의 우수한 편집자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호프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연구서도 몇 권 찾아보았지만 모두 그 부분들은 아예 무시되어 있었다. 저자들은 대개의 경우 기꺼이 질문에 응답한다. 게다가 간혹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있다.

우베 팀의 Am Beispiel meines Bruders 에 관한 얘기다. 이 책은 미국에서 In My Brother's Shadow 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 저자가 만든 새로운 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오래 전에 죽은 형에 대한 꿈을 기억하고 얘기할 때 나온 Doldenhilfe 라는 말인데, 아무 의미 없는 일종의 혼합어로서 신조어 neologism 였다. 이 책은 팀 박사 가족에 대한 회고록인데 이것을 번역한 번역자들이 모두 그 말이 무슨 단어인지 문의를 해왔다고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의문스러운 점이 있음에도 저자에게 묻지 않으면 결과는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나는 Band-Aid 에서 유추하여 그 (자선사업을 의미하는) 말을 ‘Floweraid’로 번역했다. 전문적인 식물학 용어인 ‘umbel’은 식물학자가 아닌 독자에게는 좀 어려운 단어이기 때문에 flower 로 대신했다. [Dolde = umbel (산형繖形 화서). Hilfe = help.]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 내가 아는 여러 번역자들이 그렇듯이 - 문제점들이 있거나 외연을 추적해야 할 때, 저자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것은 내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Tuesday, February 3,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3)

nbg (new books in german) 라고 하는 1년에 2회 발행되는 간행물이 있다. 이름이 가리키듯이 이 잡지는 최근에 출간되었거나 조만간 출간할 예정인 독어권(독일, 오스트리라, 스위스) 작품들을 영어권의 출판사들에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매회 원작 출판사 중에 한둘은 편집 위원회에 초청된다. 나도 편집 위원 중 한 사람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아이히보른 출판사가 출간한 ‘레건로만 Regenroman’ 은 nbg 에 제출된 타이틀 중 하나였다. 그런데 nbg 가 의뢰한 평가자들 reader 중에 ‘레건로만’을 맡은 평가자는 이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nbg 는 매회 출판사들이 제출하는 100권 가량의 책들 중에서 20여 권만을 선정해서 이들에 대한 서평을 싣는다. 그런데 ‘레건로만’은 선정되지 않았다. 편집 위원회는 상당수의 타이틀에 대해서 평가자들의 의견을 따른다. 아무도 그 모든 책들을 전부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그때 객원 편집위원이었던 로즈메리 데이빗든이 평가자의 ‘레건로만’ 요약을 읽고 흥미가 발동해서 ‘레건로만’을 자신이 직접 읽어보고는 영역본에 대한 판권을 샀다.

나는 ‘레건로만’을 읽기 시작하면서 과연 이 책이 nbg 에 포함되었어야 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번역에 착수해서 재미있게 번역하며 어느 정도 진행했을 때 이 책의 스타일의 독창성과 장점을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번역이라는 정밀 작업은 질산으로 하는 시금試金 작업이다. nbg 의 평가자는 그런 연장된 작품 요소들을 식욕이상증진 bulimia 의 에피소드로 보지 못했고 화염 총을 사용한 살인 장면을 문맥상에서 보지 못했다. 문맥상으로 볼 때 그런 구성 요소들은 결코 충격이나 공포를 유발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소설의 구성에 적합한 것임을.

Monday, February 2,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2)

번역자 협회가 속해 있는 작가 협회의 정기 간행물인 “작가 The Author”誌 최신호에 좋은 기사가 났다. 이 기사에서 에릭 디킨스는 영역 작품의 상대적 기근을 개탄한다. 그는 또한 많은 문학 번역자들이 전문적인 시각을 가지고, 신뢰할 만한 판단을 스스로 해서 번역할 만한 책을 출판사에 제안할 것을 권한다. 내 자신의 경험으로는 대개 적어도 절반 정도는 그런 식으로 일이 성사된다. 어떤 책에 대해서 세심할 정도로 솔직한 평가를 해주는 것은 원고/도서 평가자 reader 로서의 번역자가 해야 할 일이다 - 출판사들은 대개 원작을 읽어낼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외국어로 된 책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콜리지 Samuel Coleridge 가 어디에선가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이 외국어 서적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근한 만족감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번역자가 출판사를 위해서 대신해서 책을 읽을 경우, 사정은 다르다. 실제로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출판사에 책을 추천함에 있어서 극도로 신중해야 하는 것은 평가자 reader 의 임무인 까닭이다. 한편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한 번역 제의를 출판사로부터 받을 때는 먼저 그 책을 읽어본 다음에 그 일을 맡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번역자들은 실제 번역 과정이 그 책에 대한 어떤 시험대가 되는지 잘 안다. 어떤 책을 읽고 그것을 번역 출간하도록 권해서 출판사가 그 책을 번역하기로 결정했을 경우, 번역자는 적어도 번역이 끝날 때쯤이면 자신이 옳은 평가를 내렸는지 아닌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Sunday, February 1,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1)

영국의 저명한 번역가 안시아 벨(b. 1936)의 번역 이야기에서 흥미롭거나 요긴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우리말로 옮긴다. 시간 나는 대로 매일 조금씩 번역해서 올릴 것이다.

Regenroman 의 영역본 제목은 Rain 이다. 두운頭韻이나 분위기 면에서 두운을 보나 소설의 분위기를 보나, Rain 보다 더 독어 원작의 제목과 어울릴 제목이 없었겠지만, 나는 아직도 원작의 제목이 좀 약해진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분위기가 - 비유적인 분위기뿐만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분위기가 -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각 장의 제목은 일기예보에서 쓰는 말이다. 내가 출판사에 제안한 제목은 A Rainy Story 이다. 하지만 나는 내게 제목을 생각해내는 특별한 재주가 없음을 잘 안다. 그뿐 아니라 기실 나는 내가 번역할 책의 원제가 고유명사일 경우, 나는 안도의 숨을 때는 안도의 숨마저 쉰다. W.G. 제발드의 “아우슈털리츠 Austerlitz”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 . . 제목이 고유명사일 경우에는 번역자로서나 번역서 출판사로서나 별문제가 없다.

원제가 고유명사가 아니고 노래의 제목인, 카렌 두베 Karen Duve Dies ist kein Leibeslied (This Is Not A Love Song)의 경우에도 별문제가 없다. 나는 이 책을 2004년 5월에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강의 초고 작업만 해놓았을 해놓은 시점에서 어느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세미나의 참석자들은 내가 그 책을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책의 내용에 나오는 1970년대의 독일 팝송 가사 중 특정 부분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내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강의 초고만을 마쳤기 때문에 정확한 똑 부러진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번역자들은 저마다 번역자마다 제각기 모두 선호하는 작업 방식이 있다. 내 방식은 먼저, 최대한 빨리, 대충 초고를 끝내는 것이다. 그런 다음 1차 개고와 2차 개고는 좀더 천천히 진행한다. 내가 이런 방식을 택하는 부분적인 이유는, 초고를 준비하며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의문 사항이나 문제점들은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이 나중 부분에서 나중에 그 해답이 주어지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번역자들은, 흡족하지 않은 번역을 하고 지나간다는 초조한 생각에 조바심을 내고, 초고부터 모든 것을 다듬어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내가 아는 어떤 번역자는 번역할 책을 번역에 앞서 한번도 읽어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윌리스 반스토운 Willis Barnstone 이 그의 책 “번역의 시학 The Poetics of Translation”에서 규정한 경험을 십분 만끽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번역은 특정한 종류의 독서, 즉 원작 텍스트에 대한 “정밀 독서”가 되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 번역자가 번역할 책을 먼저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번역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지, 난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번역자는, 번역할 책의 장단점, 그리고 그 책이 출판사의 출간 목록에 끼어서 어울리는지 등에 관해 출판사에 소견을 말해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번역할 책을 번역하기 전에 먼저 읽어보았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많은 경우에 그러하다. 학자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 나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소설을 특별히 선호하지만 - 여러 분야의 책을 번역하는 현역 번역자로서 하는 얘기다.

Saturday, January 31, 2009

중간 점검

번역비평에 관한 포스트는 여기서 그만두어야겠다. 번역비평을 생각하자니 예를 들지 않을 수 없고, 그러자니 기존 번역 텍스트에서 끌어와야 하는데, 가만히 둘러보니 자칫 여러 사람들에게 못할 짓 할 것 같아서이다. 번역비평은 내 공책에 나 혼자만의 탐구로 계속하겠지만 블로그에는 올리지 않기로 한다. 비평의 준거가 마련되면 그 리스트만 간추려 올릴 생각이다.

이제부터는 원래의 의도를 상기하고, 시간 나는 대로 번역의 이론과 실제 theory and praxis 만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오늘은 비트겐슈타인의 한 마디만 여기에 옮겨 놓자.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수학적인 과제다. 예를 들어, 서정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Translating from one language into another is a mathematical task, and the translation of a lyrical poem, for example, into a foreign language is quite analogous to a mathematical problem.

루트비크 비트겐슈타인
Remarks on the Philosophy of Psychology
quoted in Willis Barnstone, The Poetics of Translation: History, Theory, Practic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3.

Thursday, January 29, 2009

쉬어 가기

번역 텍스트만을 가지고 하는 번역 평가에는 어떤 한계가 있으며 번역 텍스트와 원작 텍스트를 대조할 때는 원작 텍스트 자체에 대한 평가도 갖추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앞서 해보았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서 단토의 텍스트에 대한 논쟁을 예로 삼아보았다. 그것으로 그와 관련된 모든 문제점이 전부 해소된 것은 물론 아니다. 오역 혹은 부실한 번역 문제와 관련해서 빙산의 일각만을 건드리고 만 셈이다.

어쨌든 원작 텍스트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명확한 텍스트에 대한 책임이 1차적으로 번역자에게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다음으로는 편집자 copyeditor 에게 있을 것이다. 번역 텍스트를 읽고 자체 내에 일관성이 없거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을 잡아내고 번역자에게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것의 변용>에 관해 제기된 문제에 대해서는 편집자도 자유하지 못한 것이다.


번역자는 자기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부단히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별로 세운 것은 없어도 허물기 위해 번역비평을 생각해보고 있다. 나는 이 블로그를 사적인 블로그라고 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일종의 모순어법 oxymoron 이라는 사실 또한 깊이 인식하고 있다. 나의 생각을 인터넷에 올릴 때는 누군가 읽으리라는 것을 예기치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누군가 그래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 불특정 다수가 아닌 소수, 그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블로그에 내 생각을 올린다면, 과연 이 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나르시시즘의 한 형태인가? 나는 아닌 것 같지만 혹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으니 말이다.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번역이론에 대해서 지속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장치. . . 시간이 없거나 귀찮아도 지속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는 장치라고 우겨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 혼자 공책에다 끄적거리는 것보다는 강제적인 힘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또 이 생각한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무슨 일에든 개선하고 발전하기 힘든 법이다. 나는 부단히 허문다. 한편, 세우는 것이 없으면 허물 것도 없는 법 - 따라서 나는 부단히 세우며 허물고 있다.

책을 번역해가며 나타나는 난점이나 재미있는 점들을 기록해두고 또 필요시 나중에 공개하기 위해 시작하였지만, 번역의 이론과 실제를 두루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필요에 의해 번역 비평의 준거를 살펴보고 있다.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서이지만 재미는 없다. 이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쓰든지. . . 아니면 제발트나 벤야민도 고독할 테니 그들과 얘기나 나눌까. . . 아니면 워즈워드에게서 위로를. . .

별이 빛나는 밤
호수는 곱고 아름다우며
햇빛은 찬란하게 탄생하지만
어디를 가든 이 땅에서
찬란함이 사라졌음을
나는 안다
(. . .)

번역 © Gene Ghong

Waters on a starry night
Are beautiful and fair;
The sunshine is a glorious birth;
But yet I know, where'er I go,
That there hath passed away
a glory from the earth.

윌리엄 위즈워드의 송시에서
Trans. Gene

Sunday, January 25, 2009

번역비평 (9)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 + 원작 텍스트

다른 포스트에서 코드화니 해독이니, 딱딱한 말까지 애써 동원해가며 원작에서 번역에 이르는 복잡한 과정을 단순화해서 살펴보았다.

번역본에 불명확한 부분이 있다면, 그 원인의 소재가 원작 텍스트에 있을 수도 있다고, 지난 포스트에서 문제 제기를 했다. 그렇다고 번역자의 책임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그 책임은 다름 아닌 연대 책임이기 때문이다.

또 싫다고 하는 히니 Seamus Heaney 와 예이츠 W. B. Yeats 까지 억지로 끌어들여 기술과 기예를 말하게 했다. 나는 히니에게, 기예가 없는 기술은 생명이 길지 못하고 기술이 없는 기예는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말을 해달라고 했는데, 빼어난 술術과 농익은 예藝를 갖춘 시인답게 인식의 경계 부근에 있는 것을 끌어와서 함축적이면서 간명한 정의를 내리고는 이에 부연하려는 예이츠를 데리고 퇴장했다.

이 모두 필요해서 그러는 것이다.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의 이모저모를 살피려다 보니 의외로 늘어나는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다.

원작 텍스트를 참조하지 않고 번역 텍스트를 평가할 때, 비평 가능한 범위가 무엇이며 또 어떤 비평기준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있는 생각해보는 과정에 있다. 또한 원작 텍스트에 비추어 번역 텍스트를 평가할 때, 어떤 한계가 있으며 또 어떤 비평준거가 있는지, 이 블로그를 통해서 살펴보는 과정에 있다. 이 구도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번역 텍스트에서 접하는 불명확한 텍스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다 보니 코드와 해독이라는 재미없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기술과 예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번역 텍스트의 불명확성 문제를 다루자니 나중에 다루려고 했던 원작 텍스트의 불명확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르렀다.

원작 작가가 사고의 본처本妻와 직관의 첩妾 사이를 왕래한 끝에 착상을 품게 되고, 이 착상은 일정한 기호 또는 활자로 표시(코드화)된다. 착상이 기예에 접接하고, 노련한 기술 이 훌륭한 유모 같은 원예사가 되어준다면, 그 열매는 보기엔 탐스럽고 입에는 꿀 같아질 것이다. 이런 열매 중에서 번역자가 관여하는 것은 이국에서 맛보는 열매다.

번역자는 이국異國의 열매를 맛보고, 이 열매를 재배하는 기술을 배우고, 씨나 접가지를 가져다가 자국自國의 토양에 심는다. 싹을 틔우고 재배하여 자신이 이국의 땅에서 맛본 열매를 수확하려 노력한다. 다른 사람에게 이 열매를 맛뵈기 위해서 참으로 오랜 세월 눈물겨운 일을 한다. (한국의 이접移接 과정과 토양이 이상적이지 않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므로 여기서는 접어두겠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는 언제나 이상적이다. 최소한 내가 품는 시나리오는 내 자신에게는 언제나 이상적이다. 삼천포로 빠지기 전에 다시 열매로 돌아가자.

지금 얘기하고 있는 열매, 이 원산지의 열매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아직도 혹 골방에 숨어서 나에게 피해를 주는 편견의 이단자가 있는지!

그렇다. 원산지 열매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원산지의 레이블에 대한 신뢰 때문에 혹은 겉으로 보기에 먹음직스러워서 막상 입에 넣어보지만 보기만큼 달지 않은 경우가 있다. 혹은 겉으로 보아서는 먹음직스럽지 않아도 먹어보니 의외인 경우도 있고, 겉을 보니 흠집이 있어도 혹시나 하고 먹어보니 역시나 하는 경우가 있다. 또 포도처럼 일부는 괜찮고 일부는 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외에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원산지 과일에 대한 맹신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한 가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원산지의 토양이 좋을수록 양질의 열매가 산출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요, 확률의 문제이지 반드시 양질의 열매가 산출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 이제 오늘 포스트에서 진짜 얘기하고자 하는 상한—혹은 부분적으로 상한—열매 하나를 손에 들고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겠다.

불명확한 텍스트에 관한 예를 들려고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좋은 예를 발견했다. 내가 요즘 자주 찾는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서 발견한 것이다. 미국의 미술 비평가 아서 단토 Arthur Danto 의 <일상적인 것의 변용> 중에 한 짧은 텍스트에 관한 것이다. 서재 주인의 문제 제기는 정당한 것이었지만 이를 쟁점으로 삼아 논쟁에 참여한 분들의 일부 비판, 비판 과정, 그리고 결말이 아름답지 못했다. (‘아름답지 못했다’고 함으로써 이 발언에 대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을 해줄 부담이 내게 주어짐을 나는 충분히 인식한다. 그리고 이 부담을 덜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의 가장 큰 불만은 원저자에게 있다. 이 불만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드러날 것이다.

<로쟈의 저공비행>에 실린 문제의 원작 텍스트와 이에 대한 번역 텍스트는 각각 다음과 같다.

It is (just) possible to appreciate his acts as setting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practical demonstrations that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그의 행위는 하찮은 대상들을 모종의 미적 거리 안에 배치했고, 그 결과 그것들이 미적 향수(享受)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간단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 즉 가장 가당치 않은 곳에서 모종의 아름다움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전문 번역자 치고 텍스트의 유형을 생각해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 소설, 철학, 기술, 기타 등을 비롯한 등등 여러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이런 구분을 해보는 이유는, 번역의 대상이 되는 일정 텍스트 내에서, 번역의 기본적인 방향과 전략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단토는 미술비평가다. 또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한 사람을 제대로 연구해보지 않고 그 사람의 재능과 업적을 평가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의 텍스트와 단토의 편지를 보고, 그가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그 이름에 값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떨칠 수가 없다. 내가 명철한 철학자에게서 기대하는 수준에 비추어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예藝는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술術이 못 받쳐주는지도 모르고... 아니면 예藝의 부족함을 술術로 채우려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텍스트로 들어가 보겠다.

원작 텍스트의 improbable 에 대한 번역이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된 것에서 논란이 불거졌다. 이 단어에 대한 번역자의 부정확한 독해 때문이다. (원작 텍스트에서 ‘참 true’ 과 ‘거짓 false’ 을 가릴 수 있는 텍스트의 경우, 이것이 번역되었을 때, 이것을 ‘거짓’이라고 부를 수 있으면, ‘틀렸다’고 하지 않고 ‘부정확 inaccurate 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먼저 단어들을 개별적으로 살펴보겠다. “특정 단어, 패턴, 문장 구조 등이 개별적인 ‘의미의 단위’로 분석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기에는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복잡다단‘多端’한 속성을 일단 무시하고, 각 단어를 개별적으로 이해하고 음미해봄으로써, 그 개별적인 단어들을 보다 잘 다룰 수 있기 위하여서라면 개별적인 분석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Baker, 1992: 12)

appreciate ‘어떤 상황/문제를 appreciate 하면, 그것을 이해understand하고 또 그것에 수반/포함 involve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know.’ 원작 텍스트에서 appreciate 의 대상이 his acts 이고 as 가 따르므로, 여기서는 ‘음악이나 음식 등에서 좋은 점을 알아보고, 그것을 좋아한다’는 의미를 제외하고 또 ‘감사한다’는 의미도 제외한다.

edifying (1) 어떤 사물이 edifying (= instructive) 하다고 하면, 그것이 어떤 쪽으로든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무엇을 통해서 내가 배우는 게 있으면, 그것이 edifying 하다고 한다. 예: ‘18세기에는 미술이 음악, 시와 함께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 ‘In the 18th century art was seen, along with music and poetry, as something edifying. (2) 무엇에 대한 불만이나 반감을 나타내고자 할 때나, 또는 그 무엇이 무언가 유쾌하지 않은 것이든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비출 때, 그것이 그리 edifying 하지 않다고 (-> not very edifying -> unedifying) 한다. 예: ‘그 모든 것 때문에 불쾌한 (혹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생각났다.’ = ‘It all brought back memories of a not very edifying past.

그러나 Oxford 사전에는 unedifying 을 따로 올림말로 삼고, 반감을 가지게 할 정도로 유쾌하지 않은 것을 표현하는 말로 정의한다. 예: ‘두 정당 지도자들이 서로 큰소리로 시끄럽게 싸우는 보기 흉한/눈살 찌푸리게 하는 장면’ = ‘the unedifying sight of the two party leaders screeching at each other’

aesthetic distance: 심미적 거리. 영한사전에도 '심미적 거리'로 나와 있는 미학 용어다. 통용되는 명제적 용어이므로 그대로 옮기면 되겠지만 사실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이것은‘독자 혹은 관객과 예술 작품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Dictionary of Literary Terms and Literary Theory, Penguin (1999), p. 10) 예술가(작가/미술가)는 창작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창작물과 독자/관객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부여 the work is distanced 한다. 이 (심리적인) 거리 때문에 창작물을 현실과 혼동하지 않고 미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구문 syntax 을 다룰 때 그 이유를 언급하겠지만, 인문서 번역자가 주제 지식을 갖춰야 하는 이유는, 아래의 aesthetic delecta
tion 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사전事前에 주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더라도 원본을 독해하는 과정, 번역하는 과정에서 리서치를 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심지어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하는 번역보다 더 훌륭한 번역을 할 수도 있다. 전문 서적 번역본의 대상 독자가 일반인일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안시아 벨 Anthea Bell 은 영국의 저명한 번역가다. (나는 그할머니의 번역을 모든 번역의 모범으로 여긴다.) 2002년에 펭귄 출판사가 프로이트 시리즈를 새로 기획하며 일부러 정신 분석학 전문가 혹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벨 할머니에게 프로이트를 맡겼다(The Psychology of Everyday Life). 정신분석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일반 독자로서훌륭한 일반 독자로서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입장에서 실제로 이해해가며 번역했기 때문에 일반 독자가 읽기 편한 번역이 되었다. 사전 주제 지식이 없다는 것이 핑계가 될 수 없는 아주 좋은 예다.

render: 이 단어의 여러 의미 중에서 두 가지만 본다. (1) render + 무엇 + 형용사. 이 같이 쓰이며 ‘무엇’이 ‘형용사’가 뜻하는 상태로 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 ‘무엇에 틀린 것이 너무 많아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 ‘It contained so many errors as to render (= make) it worthless. (2) 특정 언어로 씌어 있거나 또는 특정 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다른 언어나 방식으로 번역 translate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표지판과 안내방송이 안내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되어 있었다.’ -> ‘All the signs and announcements were rendered in English and Spanish.’

improbable: (1) improbable 한 것은 사실일 것 같지 않고 혹은 발생할 것 같지 않다. 예: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우연’ -> ‘a highly improbable (= unlikely) coincidence.’ (2) 내가 무언가를 보고 improbable (= unlikely) 하다고 하면, 그 무엇이 이상하고 뜻밖이거나 strange, 흔치 않거나 unusual, 터무니없는/말도 안 된다는 ridiculous 것을 의미한다. 예: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의 결혼은 흔치 않은 결연結緣으로 보인다.’ -> ‘On the face of it, their marriage seems an improbable alliance.’

aesthetic delectation: aesthetic은 단순히 아름다움에 대한 형용사로서, ‘미적美的’으로 쓰거나 아름다움을 살핀다는 의미를 살려 ‘심미적審美的’으로 옮길 수 있다. ‘미학적美學的’이라는 말은, 가급적 그 말을 써야 하는 특수 문맥을 빼고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delectation: 내가 누군가의 delectation 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면, 나는 그 누군가를 즐겁게 혹은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예: ‘그녀는 집에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즐겁게 하기 위해 케이크를 만든다.’ -> ‘She makes cakes for the delectation of visitors.’ 이 단어의 개별적인 뜻은 그러하지만, 이 말이 마르셀 뒤셩 Marcel Duchamp 이 한 말이며,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알면 향수享受라는 고상한 말을 쓰기 어렵게 된다. (‘뒤샹’이라고 하지 말고 ‘뒤셩’이라고 하겠다. ‘샹’의 어감이 별로 좋지도 않고 또 원래 발음이 ‘셩’에 가깝기도 한 까닭이다.)

기제품旣製品 [변기, 빗자루 등]의 선택은 심미적 즐거움의 영향을 받아 내려진 선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심미안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각적인 무관심이 보이는 반응에 기초한 선택”이라는 말을 했다. 존 듀이 John Dewey 가 말하는 종류의 전통적인 심미안, 즉 아름다운 것에서 취하는 즐
거움을 경멸하며 한 말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도락道樂 이라는 말이 좋다고 생각한다. aesthetic delectation 은 사전적 혹은 명제적 낱말 뜻 propositional meaning 에 화자話者의 감정이나 자세가 실린 말이다. 어의 lexical meaning 의 유형 typology 에서 이것을 ‘표현 의미 expressive meaning’ 라고 부르기도 한다. 표현 의미는 명제적 의미와는 달리, 참이나 거짓으로 평가할 수 없다.

practical demonstration: practical 한 생각/방법은 실제 상황에서 효과적일 것이다. demonstration: 어떤 사실/상황의 demonstration은 그 사실/상황의 명백한 증거 proof 다.

the least likely places: the least likely places = the least probable places = the most unlikely place ≠ the most likely places.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곳, 전혀 뜻밖의 장소,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


단어의 정의는 COBUILD Dictionary of English (Sinclair, 2006) 에 의거함.



이렇게 개별적으로 살펴본 단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원작 텍스트의 문장 구조 structure 를 살펴보고 나서 함께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그런 다음, 아서 단토 Arthur Danto 의 편지 내용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논평을 한 뒤, 이 포스트를 끝맺도록 하겠다.

첫 문장의 ‘It’는 ‘to appreciate’ 라는 경험/행위에 대한 코멘트를 도입하는 데 쓰인다. 이 ‘it’는 문법 용어로 가주어假主語라고 불린다. “주어 부분(주부主部)이 길어지는 것을 피하거나, 또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문장 끝에 둠으로써 좀더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하는 데 쓰인다(COBUILD English Grammar (Sinclair, 2005), p. 411).


이 가주어
it와 코멘트 is (just) possible, 그리고 ‘to appreciate’ 를 잠시 떼어놓고 그 다음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practical demonstrations 은 나중에 따로 생각할 것이다.)

His acts set these unedifying objects at a certain aesthetic distance, rendering them as improbable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s.


어려운 구문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것은, 현재분사 rendering 용법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나, 사물 등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에 대해서 추가로 어떤 말을 덧붙이고자 할 때, 주어를 쓰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용법이다. 이 용법에서 현재분사가 이끄는 절은 주절主節을 수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능은 다음과 같다.

(1) 동시성: 누군가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거나,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때, 둘 중 하나는 주절에서 말하고, 다른 하나는 분사가 이끄는 절로 말한다.

Jane watched, weeping, at the doorway.
-> 제인은 문간에서 울며 바라보았다. = 제인은 문간에서 바라보며 울었다.

(2) 순서적: 무엇을 하고 나서, 바로 다른 무엇을 하는 상황을 표현할 때, 먼저 한 것은 분사가 이끄는 절로 말하고, 다음에 한 것은 주절에 말한다.

Leaping out of bed, he dressed so quickly that he put his shoes on the wrong feet.
-> 그는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 나와서 옷을 급히 입는 바람에 신발을 바꿔 신었다.

(3) 이유: 어떤 행동이나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이유를 말하고자 할 때, 행동/벌어지는 일은 주절에서 말하고 이에 대한 이유는 현재 분사가 이끄는 절에서 말한다.

At one point I made up my mind to go and talk to him. Then I changed my mind, realizing that he could do nothing to help.
-> 그러다가 한번은 그를 찾아가서 말하려고 작정했지. 그랬다가 그가 도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먹었어.

위의 (2)는 He dressed so quickly, leaping out of bed, and put his shoes on the wrong feet. 으로도 쓸 수 있기 때문에 과거분사의 위치만으로는 (2)의 경우인지 (3)의 경우인지 ‘결정적으로’ 알 수 없다. 물론 (3)에 (2)같은 요소가 있다. 깨닫고 ‘나서’ 마음을 고쳐먹었으니까. 그러나 (3)에서는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가 깨달음이라는 것을 말해주는데, (2)에서는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났기 때문에 옷을 급히 입었다고 딱히 말할 수 없다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순서’인지 ‘인과’ 관계인지는 내용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행위는 유익하지 않은/자기 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비계발非啓發적인 대상/오브제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었다.
-> 그의 행위는 이 비계발적인 오브제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었다.
-> 그의 행위는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두었다.

(‘유익함’이라고만 하면 뜻이 뚜렷하지 않으므로, 물질적인 유익을 배제하여 ‘정신’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겠다.)

-> 그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가 부여/형성되었다.

위에 설명한 improbable 의 낱말 뜻에서 (1) 은 ‘있을 법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했다. ‘an improbable story’ (Oxford English Dictionary) 는 ‘있을 법하지 않은/가능할 것 같지 않은/거짓말 같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2)는 ‘기대/예상과 달라서 이상하게 보인다’는 뜻이라고 했다. ‘His hair was an improbable shade of yellow.’ 노란 색 머리도 짙음과 옅음 정도에 따라 여러 색조를 띨 수 있는데 그 여자의 노랑머리는 일반적인 노랑머리와 다른, 전혀 생각지 못한 이상한 노랑색이라는 것이다. 변기가 깨끗하고 세련된 미술 전시장 한 복판에 전시되어 있으면 그 전시장은 변기가 있기에 improbable 한 곳이다. 그러나 해당 문장의 나머지 부분에 의해 이 의미는 수정된다.

여기서 candidate 은 ‘어떤 특정한 목적에 어울린다고 여겨지는 사람/사물’ 혹은 ‘어떤 특정한 무엇을 할 것 같거나, 어떤 특정한 무엇이 될 것 같다고 여겨지는 사람/사물’을 뜻한다. 이 단어의 다른 의미, ‘후보’라는 의미나 ‘후보작’이라는 뜻은 이 경우에 어울리지 않는다. a candidate for aesthetic delectation 은, 아직은 그렇지 않지만 앞으로 ‘심미적 도락이/을 될/줄 수 있는 대상’이다. 화가가 그림을 완성해서 전시장에 걸면, 이 그림은 a candidate for aesthetic delectation이 된다. 전시된 이 그림이 관람객에게 심미적인 즐거움을 주면, 이 그림은 비로소 그 특정 관객과의 ‘심리적인 관계’에 있어서 candidate 라는 딱지를 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these unedifying objects 가 그런 미도락美道樂의 대상이 되기에는 이상하고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지만 어쨌든 이것들을 그 미도락의 대상 candidates 으로 삼는다는 얘기다.

이 문장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현재분사 rendering 가 이끄는 절은, 주절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해주며, 이유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이 현재분사가 이끄는 절은, 종속절 finite clause 이 아니라 비종속절 non-finite 이다.
주절을 수식하거나 한정하는 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한 심미적 도락의 대상으로 해석하고
->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render 는 ‘... 으로 삼고’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여기서는 render 의 (2) 에 해당하는 의미를 선택했다. render 는 주어진 예문의 render… in(to)… 말고도 render… as… 로 쓸 수 있는데, 그 용법이 약간 다르다. 예문을 보면 그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을 것이다.
The Korean phrase can be rendered as ‘I love you.’

translate 는 물론 ‘번역하다’라는 의미다. 저자가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 ‘carry across’ 를 생각하고 일종의 시적인 허용 poetic license 을 발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render 가 예술 작품의 창작 행위와 관련해서 쓰일 때, ‘무엇을 표현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하지만 여기서 이 의미는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구문 구조가 그러그러하고, 이 구문의 의미가 그러그러하기 때문이다. ‘삼다’에 ‘무엇을 무엇이 되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나도 ‘시적인 허용’이란 걸 써보는 것이다.

그럼 두 절을 합쳐보자.

(그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 (그의 행위를 통해서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가 부여/형성되었다.
->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부여한 것으로 그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혹은 그런 이해는 가능성일 뿐이다’라고
저자가 왜 그랬을까? 의문에 철저해야 한다. 그 대답은 원작 텍스트에 주어져 있지 않다. 이 자리에 인용된 텍스트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는 얘기다. 그 대답은 뒤셩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럼 뒤셩에게 물어볼까? 위에서 인용한 말을 다시 밑에 써본다.

“기제품旣製品 [변기, 빗자루 등]의 선택은 심미적 즐거움/도락의 영향을 받아 내려진 선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심미안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시각적인 무관심이 보이는 반응에 기초한 선택”이다.


뒤셩은 그 물건들을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 이라고 여기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순전한 무관심 가운데 눈에 띠는 띄는 아무거나 그냥 취한 셈이다. 그가 그런 사물을 선택한 것은 ‘심미’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 동기動機는 그게(심미)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있다면 '무관심'이라는 것이라고 극구 주장한다. 뒤셩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도 뭔가 있겠지 하고 많은 사람들이 끈질기게 들러붙어 그에게 질문을 했다. (뒤셩은 물론 이것을 즐겼다.) 여기에 단토도 가만있을 수 없어 자신의 통찰력을 만천하에 알려야만 한다. 즉, 뒤셩이 그 물건들에 심미적 거리를 준 것은, 순전한 무관심에서가 아니라, 또 순전한 candidates for aesthetic delectation은 아니라 하더라도−즉 그것이 아무리 이상한/비정상적인 improbable 대상이라 하더라도−어쨌든 대상으로 삼아서/취해서/변용해서, 미술관에 전시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just) 라는 말을 끼워넣으며 자기 소견은 충분히 피력하면서, 그것은 그저 의견/가능성일 뿐이라고 슬쩍 양다리 걸치는 것이다.

practical demonstrations 이하는 앞선 문장에 대한 추가 정보/설명이다. 여기서 쓰인 콜론 colon 의 의미가 그러하다.

beauty of a sort: 여기서 of a sort 는 ‘모종의, 일종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의미로 쓰려고 했으면 of some sort 라고 했을 것이다. of a sort 로 앞의 명사를 한정한다. 왠지 질이 좀 떨어지거나 수준 이하인 무엇을 형용해주는 말이다
of sorts 로 쓸 수도 있다. 바꿔 말하자면, beauty of a sort 는 일반적으로 beauty 라고 여겨지는 요소는 갖추고 있지 않아서 딱히 beauty 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어쨌든 beauty 이기는 한 것이라는 의미다. beauty of a poor kind 또는 mediocre beauty 라고 봐도 좋다.

in the least likely places: 이것은 분명 한 가지 의미로밖에 읽히지 않는데, 논쟁이 오간 내용을 보고 quot hominess, tot sententiae 라는 라틴어 문구가, 진부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진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제각기 생각이 다르다는 뜻이다. 신발을 셔츠라고 하면, 그렇다/아니다, 참/거짓으로 가릴 수 있다. 명제적인 의미 propositional meaning 를 가진 단어들이기 때문이다. place 도 마찬가지다. 장소/위치를 의미하거나 상징하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문제의 텍스트를 처음 읽었을 때, 명쾌한 문장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냥 대충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저자인 단토의 답장이다.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이 문제의 텍스트에서 그는 place 가 갤러리 같은 전시 공간을 가리킨다고 한다. 저자가 우기면 할 수 없다. 그러면 게임 끝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니다. 저자는 얼마든지 우길 수 있지만, 게임 종료 호루라기를 부는 것은 독자 개개인에게 달려 있다. u 가 아니고 v 아니냐고 묻는데 저자가 u 라고 하면 그걸로 끝이지만, u 를 쓰려고 했으면 u 가 v 로 보이지 않게 잘 쓰라고 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저자의 주장은 주장에 기초하면 문제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꿔 써볼 수 있다.

Beauty of a sort can be found in the unedifying objects, exhibited in the least likely places for them to be.

One may find beauty of a sort (even) in the unedifying objects, when once they are exhibited where one may not expect them they are least expected to be.

그럼 다음과 같은 문장을 한번 보자.

Often the best fish are found in the least likely places.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좋은 물고기가 잡히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는 말이다. 좋은 물고기가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지 않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심미적 대상, 즉 예술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란 게 있으리라고 기대되지 않는 화장실, 부엌, 길거리, 상점 (the least likely places) 등, 이런 곳에서 발견하는 물건도 심미적인 거리가 부여(미술관 전시)되면, 심미적 대상
뒤셩의 시대 이전, 전통적인 미술관에서 보던 전통적인 예술품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더라도이 될 수 있다는 문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다만 of a sort 가 있어서 완전히 깔끔한 읽기 reading 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변기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 in the least likely places, 즉 미술관의 전시장에 전시물로 전시됨으로써, 이 변기가 미술품이 된다는 의미로 그렇게 썼다는 것이 단토의 말이다.

어쨌든 미술 전시장에서는 고품격 미술품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 미술품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기대하는 것은
질이 좋든 떨어지든정상적인/자연스런 현상이다. 단토는 of a sort 를 씀으로써 그런 의미가 십분 전달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 외에는 그렇게 볼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미흡한 문장이다. 분명하지 않다. 정리해보자.

전혀 뜻밖인 곳에서 격이 떨어지는 미美가 발견될 수 있다는 실제적인 증거.
->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좀 모자라는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단순히 이론이 아닌) 실제적 증거다.

(그러나 practical을 virtual, almost 의 의미로 다시 보고 다음과 같이 옮겨본다. 시범/입증에는 본질적으로 실제적인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practical 의 의미를 가볍게 보지 않기로 한 것이다.)

-> 아름다움은, 격이 좀 떨어지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즉, 뒤셩은 그런 것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위의 결과가 그것을 입증한 셈이 되었다는 의미다.)


모두 종합해보자.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부여한 것으로써 그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가능하다. 아름다움은, 격이 좀 떨어지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 그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이것은 가능성일 뿐이다). [뒤셩이] 정신에 유익함이 없는 사물을 심미적 도락의 비정상적인, 심미적 도락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어느 정도 심미적인 거리를 부여했다. 부여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격이 격은 좀 떨어지더라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찾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단토가 훌륭한 철학과 비평안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단토는 스스로 “대중 일반에게 시각 예술과 그 의미를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주된 역할”이라고 한다. 단토는 “심미적 즐거움은 위험한 것이며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한 예술품을 놓고 그것을 말로 설명하고, 이해하고, 이 말을 통해서 정신적인 함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시각 예술을 보고, 말을 통해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평범한 일반인을
그런 자신의 주장에 대한 실천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의 글이라고 보기에는 인용 텍스트가 미흡하다는 것이, 이 원작 텍스트에 대해서 내리는 나의 평가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부분적인 이해로 단토의 전체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즉, 이 텍스트에 한해서 내리는 평가라는 것이다.

단토는 그의 편지에서 심미적 거리를 설명하며 E. Ballough 를 언급한다
사실은 Ballough 가 아니라 Bullough 다. 벌러우가 1912년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psychical distance as a factor in art’를 언급했고,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쓰기 시작했지만, 사실 이것은 칸트의 <판단력 비평>(1790)에서 훨씬 오래전에 이미 언급되었던 개념이다.

앞선 포스트(01-18-09)에서 사상의 코드화 얘기를 했고, 다른 포스트(01-20-09)에서는 히니 Seamus Heaney 의 예술관을 들먹거렸다. 단토의 사상이 훌륭할지는 모르지만, 즉 히니의 말을 빌자면, 예藝는 있을지 모르지만 예를 푸는 술術(착상을 정교한 기호로 변환해주는 기술)이 그만 못하다는 인상이다. 아니면, 저자의 사상思想, 활자로 코드화되기 전, 머릿속에 무형으로 운행하던 착상의 무리 자체에 질서와 명확함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경우에는 아무리 술術이 뛰어나도 명쾌한 사상이 담기지 못하니까. 그러나 이것은 단편을 통한 인상일 뿐이며 그의 글을 더 읽으면 그 부정적인 인상이 지워질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철학자, 사상가일수록 그들의 글이 명쾌하다. 특정 개념이 심원하여 어려울 수는 있을지언정 구문과 글결은 명쾌하고 정치精緻하다. 인문 계통의 저자들에게서보다, 훌륭한 수학자나 과학자들 가운데서 훌륭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발견할 확률이 더 높다. 자신의 사상을 책으로 써서 내는 것은, 소통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그런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누구를 탓해야 할까?

독자에게그 책임 소재가 있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정밀 독해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경우, 많은 것을 놓치거나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근래, 개인 컴퓨터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정보의 교환이 쉬워졌고 그 양은 넘쳐난다. 이 모든 것을 소화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때문인지 많은 양의 정보를 섭취한다. 학교에서도 수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 대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속독을 할 필요가 있다. 또 속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학생, 학자들의 현실이다. 정밀 독해는 점점 실종되어 가고 있다. 심지어는 학교에서조차도 그렇다. 많은 양을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문제의 텍스트를 번역한 분을 탓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그분도 정밀 독해가 실종된 교육의 산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저 시간에 내몰려 성의 없는 번역이 되었을 수도 있다. 사회와 학원의 일반적인 환경이 그렇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가 아니다. 단정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은 책을 번역하느라 애를 썼을 것 같다. 한두 문장에 돋보기를 들이대어서 이 정도 비판을 받지 않을 번역서는, 특히 인문 교양서는 별로 없으리라고 짐작한다. 나는 번역서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문제의 텍스트 말고, 나머지를 충분히 고려해보면, 긍정적인 면도 있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재미있는 텍스트를 번역해도 번역 작업은 고되다. 이 일의 본질이 그렇다. 육체적으로 상당한 지구력을 요할 뿐더러, 정신적인 노동의 양과 시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적인 보상이 이에 값하지 못한다.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실한 번역에 대한 번역자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른 생계 수단이 있고, 충실한 번역을 할 시간적인 여건이 되지 않으면 맡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가 그 번역자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핀잔이다. 이 문제의 텍스트는 번역자의 실력을 가늠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논쟁이 아름답게 끝나지 않았다고 앞서 언급했다.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 이해를 구하는 것은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편지 내용에서 번역자의 이름을 언급하고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암시하는 행위는 아름답지 못하다. 이상적인 방법은, 번역자가 그 부분에 대한 자신의 번역 과정을 설명해주는 것이겠고, 실수를 깨달을 경우, 실수였다고 인정하는 것일 게다. 자신의 번역이 옳다고 생각되지만, 그에 대한 비평이 여전히 존재할 경우, 역자 자신이 원저자의 의견을 받아 끝을 내는 것이 옳다. 독자가 직접 원저자를 접촉하기로 하면, 개인적인 탐구 차원에서 임해야 할 것이다. 원저자에게
번역자의 잘못을 통지하는 번역자의 이름과 학교까지 언급하고 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알리는 형식은 어떤 동기에서든 옳지 않다. 번역자에게 못할 짓이며, 집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바깥에 끌고 나가 안팎으로 망신살 뻗치는 경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 심미적인 거리라고 해도 좋다 - 생각해보면, 국제적으로 자기 얼굴에 침뱉기인 것이다. 또 설사 해결이 안 되면 어떤가? 문제 의식만 고취했으면, 환기되었으면 어쩌면 그로서 그것으로 충분했을지 모른다. 번역자가 무언가 깨닫고, 출판사가 위기 의식을 느끼고, 독자가 비평안을 가져야겠다고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말이다.

활자 전문의 전당에 걸린 간판만 보고 활자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도 경계할 일이지만, 어떤 활자에 문제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 간판마저 송두리째 폐물 처리하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 학업의 공력工力이 그러하다. 가벼이 볼 수 없는, 땀이 배인 시간의 산물인 까닭이다. 간판이 내세우는 내용에 값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지만 그것은 어느 면을 보느냐에 따른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의 텍스트를 생각하며 단토의 다른 글들을 이것저것 읽어보았지만 역시 내가 즐길만한 문장은 아니다. 사족을 달아보았다.

나도 번역비평을 두고 지속적인 고찰을 하고 있지만, 번역비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라는 것 자체가 단순하지 않은 데다, 오역을 분별해내는 것은 비평의 한 작은 부분에 속하고,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가 수많은 양상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

번역비평에서 불명확한 텍스트를 생각하는 과정에 단토의 텍스트를 끌어다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내가 이 포스트에서 행한 것은 사실 비평이라고 볼 수 없다. 전체 텍스트가 아닌 데다가 어의와 구문 분석 parse 에 그쳤기 때문이다. 초보적인 것이다. 전체를 보고, 전체의 특성에 비추어 일관성 있는 기준으로 세목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이다. 불명확한 텍스트는, 특히 이것이 오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면 사실 김새는 일이다. 더구나 첫장부터 그런 것이 발견되면 나머지는 읽고 싶지 않게 된다. 이렇게 오역으로 의심되는 부분을 논하고자 하면,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비평자의 의견을 개진하여야 한다. 그런 다음이것은 내가 여기서 일부러 하지 않은 것인데대상이 되는 번역 텍스트를 분석하며 번역자가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실수했는지 추론해보는 과정도 자세히 보여주어야 한다. 번역비평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공정하고 균형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번역비평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번역자로서의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함이고 내 자신의 번역을 돌아보는 도구를 갖추기 위함이다.

아무튼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의 발생 요인이 원작 텍스트에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다, 예를 들어 생각하다 보니 좀 길어졌다. 번역의 질을 논할 때 원작 텍스트와의 비교가 불가피한 것은, 번역 텍스트의 하자를 가려보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원작 텍스트에 대한 평가도 함께 내려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Tuesday, January 20, 2009

번역비평 (8) 불명확한 번역

번역본의 불명확한 텍스트는 여러 측면에서 그 원인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원저자의 착상에서 번역자의 해독과 기호화에 이르는 과정을 모두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생각을 출발점으로 삼고 일관성을 견지하려면, 외국어로 씌인 책이면—특히 선진국에서 씌인 책이면—무조건 신뢰하는 편견의 이단자부터 추방하고 볼 일이다. 불명확한 텍스트의 책임소재가 원저자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편견의 이단자가 추방된다고 해서 번역자가 불문곡직 책임의 족쇄를 벗어 내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족쇄를 벗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죄를 스스로 변론하여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착상을 효과적이고 정교한 기호로 변환해주는 기술, 훌륭한 사상을 훌륭한 글로 나타내는 재능은 1류 일류 작가의 표적表迹이다. (지나가는 말이지만 착상着想은 착상着床으로 보아도 결실을 바라보는 씨앗이라는 점에서 훌륭한 동음이의어를 이룬다.) 이 착상의 가시적 결실이 되는 기호화 작업에 시인 셰이머스 히니의 말을 결부시켜 생각해보고자 한다. 히니는 시인을 얘기하고 있지만 자신의 활자화된 코드를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귀한 말이다.

히니는 crafttechnique 을 구별해서 설명한다—이 말들을 각각 기술技術과 기예技藝로 번역해서 써도—미흡하지만—큰 지장은 없을 듯하다.

기술은 다른 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은 제작 솜씨다 Craft is the skill of making .... 기술은 정감情感이나 자아自我 the self 에 구애받지 않고 동원될 수 있다. 시의 기술을 배우는 것은, 시라는 우물의 도르래 쓰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대개 두레박을 절반쯤 내리고 공기만이 든 빈 두레박을 감아올리는 연습에서 시작한다. 진짜 물을 긷는 시늉만 하다가 어느 날 감아올리는 두레박이 불현듯 팽팽해짐을 느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레박이 우물물에 담가진 것이다. 이때부터 우물물은 두레박을 내리는 사람에게 계속 손짓을 한다. 자신의 내면 우물물의 수면이 깨짐이 그러하다.

기예는 두레박이 깊은 우물물의 수면을 깨뜨리고 들어가 처음으로 물을 길어낸 다음에야 비로소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기예는 낱말을 동원하는 방법, 운율과 글결 verbal texture 을 다룰 줄 아는 방법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즉, 기술도 동원되지만] 시인의 인생관을 명확히 하고 또 자신만의 실재를 명확히 함 a definition 을 포함한다. 정상적인 인식의 경계선을 넘어가서, 분명하지 않은 영역 the inarticulate [말로써 분명히 포착되지 않은 영역]에 침범함을 포함한다. 기억과 경험의 영역에서 정감의 근원이 되는 것들과, 이것들을 예술작품으로 표현하는 형식에 관련된 전략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동적 기민함 a dynamic alertness 을 포함한다.

- Seamus Heaney, Preoccupations: Selected Prose 1968-1978 (The Noonday Press, 1980), p. 47.


또한 히니는 화폐를 비유로 삼아 기예를 설명하기도 한다. 기예는 화폐에 은화隱畵를 집어넣는 것watermarking 과 같다고 한다. 인식과 목소리와 생각을 이루는 본질적인 무늬를 은선隱線의 감촉과 결로 바꾸는 것이라고 한다. 경험의 의미를 형식의 관할권 내로 불러들이기 위하여 마음과 몸[이지와 감각]의 자원이 함께 동원되는 총체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이라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W. B. 예이츠의 말은 히니의 말과 공명하는 바가 있다.

기예에 숙달하는 것은 젊은 시인의 의무다. 그런 후에야 인생 체험이 깊어졌을 때 시가 기댈 수 있는 기예의 자원이 갖추지는 것이며, 정감의 조화를 나타내는 심미적인 형식의 완성을 성취할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것이다. (W. B. 예이츠)

- Helen Vendler, Our Secret Discipline: Yeats and Lyric Form (Harvard University Press, 2007), p. 2.

기술과 기예에 관한 히니의 생각은 앞으로 생각할 불명확한 텍스트를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말을 염두에 두고 다음 포스트에서는 불명확한 번역 텍스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번역에 좀더 밀착해서 파고들 생각이다.

Monday, January 19, 2009

번역비평 (7)

"번역은 힘들고 엄밀한 예술"(Baker, 1992: 71)이라고 했다. 그러나 번역비평은 그보다 더 힘든 일인 듯하다. 얼마 되지 않지만 이 블로그를 페이퍼로 삼아 번역비평을 고찰하며 느끼는 점이다. 번역비평이라는 공정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이 공정의 산물과 외부적인 조건들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작업실 설립부터 어렵겠다는 추정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사적인 블로그이지만 이 번역 비평의 당위성을 점검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번역비평은 번역의 이론과 실제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라는 피터 뉴마크의 말을 앞선 포스트에서 언급했다. 이 말은 번역비평이 없으면 이론과 실제가 따로 논다는 말로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리 전개를 끝까지 추적해가면 그 결과는 결코 번역 일반에 호의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창하게 내다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작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번역비평은 "재미있고 유익한 훈련"이라는 그의 말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이 블로그의 당위성을 찾아 확인하고 계속 나아가겠다. 이것을 빨리 끝내고 원래 의도했던 번역이론과 실제에 들어가야겠다.

앞선 포스트(6)에서 코드화니 해독이니 하는, 모처럼 딱딱한 말들을 써봤다. 명확하지 않은 텍스트를 생각해보기 위함이다. 번역본을 읽을 때 흔히 대하게 되는 불명확한 텍스트와 생경한 언어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시간이 없는 고로, 다음 포스트에서 생각해야겠다.

Sunday, January 18, 2009

번역비평 (6) 번역본 평가

번역할 원본을 대할 때 명확하지 않은 텍스트를 다뤄야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사상思想이 텍스트로 옮겨지는 과정도 일종의 번역이다. 머릿속에 무형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이 시각적인 기호로 바뀌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일정 방식의 코드로 짜여진 사상을 다른 방식의 코드, 즉 시각적인 기호로 변환해주기 때문에 일종의 번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번역자다. 일상생활에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일상의 번역자들 가운데 활자로 변환해놓은 자신의 코드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소수의 무리가 있는데 이들을 작가라는 통칭으로 묶어서 분리한다. 이들이 코드화해놓은 활자를 읽는 독자들은 작가들의 사상, 코드화되기 전의 사상을 알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한다. 돈을 써가면서까지 독자 스스로 짊어지는 해독자로서의 의무다. 시간과 돈을 써가며 자원하면서도 해독자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고 뒷짐 지고 딴 짓 하는 독자도 있다. 아, 그러나 이 자리는 '생태학'을 논하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한눈팔지 말고 원래 하려던 얘기를 향해 나아가자.

작가가 시각적인 기호, 즉 활자로 변환해놓은 코드를 다른 활자로 바꾸어주는 일을 스스로 떠맡는 무리가 있다. 번역자 혹은 번역가로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뜻은 가상하지만 한편으론 가련하기도 하다. 영미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간혹 그냥 번역가라고 하지 않고 번역작가 translator writer 라고도 한다. (번역 얘기를 해가면서 영어문법이 필연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두 명사 중에 앞의 명사는 뒤의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 기능을 한다. 그러니까, 번역가이자 작가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번역작가라고 하는지는 이 글을 통해서, 아니 내 코드화의 결과를 통해서, 차차 드러나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번역자라는 명칭을 선택해서 쓰려고 한다. 원저자에 대하여 번역자라고 하는 것이 더 정합성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 즉 원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코드화한 활자를 다른 활자로 바꾸어주는 고된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번역자가 수행해야 할 의무는 이 코드를 해독하는 일이다. 번역자는 이 코드를 해독해서 원저자가 품었던 찬란한 신세계를 자신의 머릿속에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코드의 해독을 보다 친밀한 두 글자로 바꾸면? 독해. 그러나 번역자는 그냥 독해가 아니고 치열한 정밀 독해 작업조에 편입된다. 이 작업조에 편입되기를 거부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폐해는 실로 가볍지 않은 것이다. 다른 데 가서 딴 짓 하다가는 반역자가 되기 십상이다.

해독이 완전히 이루어진다고 해서 천사의 아리아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원저자가 거쳤던 코드화의 천로역정이 아직 남아 있는 까닭이다. 이때—translator writer 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고 앞서 암시했지만—요구되는 것이 원저자가 발휘한 코드화의 실력을 모방하여 동원하는 것이다. 원작의 시각적인 기호는 나무랄 데 없이 잘 해독해서 머릿속에 원저자가 본 신대륙이 그대로 펼쳐지지만 다른 시각적인 기호로 코드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원작의 언어가 모국어이면서 독해력은 뛰어나지만 외국어, 그 '다른 시각적인 기호'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반쪽인 것이다. 나머지 반쪽은 새로운 코드화 작업이다.

이 새로운 코드화 작업의 산물, 번역본을 읽을 때—운본과 원본과 대조하지 않고 번역본만 읽을 때—흔히 보이는 불명확한 부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한 초석으로 서론이 길었다. 다음 포스트에는 바로 이 점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Thursday, January 15, 2009

번역비평 (5) 객관적 비평 기준

번역비평에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누구든 동의할 것이다. 어떤 생각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그 생각이 입증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정의한다.생각이라는 의미에서 쓴다. 여기서 객관적인 기준의 반대는 임의적인 기준이다. 객관적인 기준은, 기준이 되는 일단의 세목 집합이 대상으로 하는 모든 텍스트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적용된다. 그러나 임의적인 기준은 대하는 텍스트에 따라서 가변적이며 심지어는 같은 텍스트 내에서도 변덕을 부린다. 임의성에 일관성이 있다면 일관성이라는 게 있기는 있을 수 있다. 가변이라는 특성이 규칙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일 게다. 것이 그것일 것이다.

객관적인 기준은 자신(기준)에게 위배되는 텍스트를 만났을 때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지적해줄 뿐만 아니라, 잘못된 과정을 추적해서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필요시 이 설명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객관적인 실례를 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부주의로 인한 실수였을 수도 있고, 텍스트의 활자를 잘못 읽은 탓일 수도 있고, 특정 분야에 대한 배경 지식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 이밖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번역비평은 비평 대상이 되는 텍스트와 비평을 독자가 나란히 놓고 스스로 저울질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번역비평이 부정적인 비평이 될 경우—즉, 잘못된 점을 지적해야 할 경우—이에 대한 개선책 혹은 대안이 반드시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흠잡기 위한 비평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이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원칙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Reiss, 2000: 5)

Wednesday, January 14, 2009

정밀독해는 번역이라는 마차를 끌고가는 말

Translation theory and literary theory come together in the act common to them both: reading. Reading is an act of interpretation, which is itself an act of translation (an intralingual translation from graphic sign to mind). Harold Bloom asserts that "'interpretation' once meant 'translation,' and still does."

[R]eading is translation and translation is reading.... Translation tends to be... an "intensive reading" of the original text, which as a result becomes an "interpretive reading."

Willis Barnstone, The Poetics of Translation: History, Theory, Practice (Yale, 1993) p. 7.

번역비평과 문예비평은 양자에 공통된 행위에서 하나가 된다. 공통분모가 되는 지점에서 만난다. 그것은 바로 독서(읽기)다. 독서(읽기)가 바로 그 지점이다. 독서(읽기)는 일종의 해석 행위이며 해석 행위 자체는 일종의 번역(시각적인 기호를 생각으로 바꾸어주는 - 같은 언어 사이에서 intralingual 바꾸어주는) 행위다. "한때 '해석한다'는 것은 곧 '번역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의미했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라고 해롤드 블룸은 단언한다.
독서는 번역을 의미하고 번역은 독서를 의미한다. 번역은 원본 텍스트를 철저히 읽는 것을 의미한다. 쪽으로 기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철저히 읽음으로써 철저히 읽음으로써 결국 텍스트를 해석하게 된다. 되는 것이다.

번역의 1차적인 작업은 정밀독해다. 정밀독해를 통해 철저히 파헤치고 이해하는 작업이 번역에 선행해야 한다. 인문서의 번역일 경우에 이 과정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이 과정에 뒤따르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W]riting is translation and translation is writing.

Monday, January 12, 2009

텍스트의 어휘 결속

번역비평 (4)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번역이론과 관련해서 비공개 블로그인 The Presence: Translator's Note 에서 포스트한 것 중의 하나를 이 블로그에 옮긴다. 텍스트 분석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항 중의 하나다. 먼저 현재 번역하고 있는 책에서 예문을 따온다.

So we trek around the corner from our houses to Sam's, the local brashly lit fish and chip shop. Jeremy tells me how one of his authors, Maureen Lipman, mourns for her husband, Jack Rosenthal. 'She makes herself frantically busy, acting and singing strenuously in a play in the West End, writing a column for the Guardian, rushing here, doing that, speaking at charity functions, etc.' Jeremy knows that since the accident, for the most part I rarely venture further than Hampstead and am now too inactive. At present, often, I sit and do not even stare. I tell Jeremy about my Uncle Isidore who when asked, 'What do you do?' replied truthfully, 'Nothing. And I don't do that until after lunch.'

결국 제러미와 나는 길모퉁이를 돌아서 있는 샘스로 힘든 발걸음을 옮긴다. 실내조명이 너무 밝은 동네 생선 튀김집이다. 모린 리프만이 어떤 식으로 남편 잭 로젠설의 죽음을 어찌나 슬퍼하는지 애통해하는지 모른다는 제러미의 말이다. 제러미가 내게 말해준다. 제러미가 하는 출판사는 모린 리프만의 책을 낸다. "모린은 자초해서 자신을 미친 듯 바쁘게 살아요. 바쁘게 몰아쳐요. 웨스트엔드의 어느 연극에 출연해서 힘겹게 정력적으로 필사적으로 연기와 노래를 하고 '가디언'지에 칼럼을 쓰기도 해요. 급히 서둘러 이동하는가 하면 항상 무언가 하죠. 또 자선 행사에서 연설을 하기도 하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를 해요." 제러미는 안다. 대체적으로, 내가 사고를 당한 뒤로는 무거운 마음을 무릅쓰면서까지 햄프스테드를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고 또 활동량이 부족하다는 무기력하다는 것을. 요즘 보통 나는 앉아 있어도 무언가를 응시하는 가만히 바라보는 일도 없다. 제러미에게 내 숙부님 얘기를 해준다. 이시도 숙부님은 "뭐 하세요?"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점심시간 전까지는 그것도 안 해."라고 하셨다. 그야말로 진실한 대답이었다.


개별적인 어구는 다른 어구와 함께 텍스트에서 만나는 관계망에 의해서 그 의미가 주어진다는 개념은 전체적으로는 언어학의 통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지엽적으로는 번역학의 통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넬혼비는 번역학에서 이 통칙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주어진 번역가는 주어진 텍스트를 분석할 때 이 텍스트에서 현상이나 세목을 분리해내어 깊이 고찰하는 일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관여하지 않고 관계망의 추적에 관여하는 것이 번역가의 일이라고 관여한다고 한다. (Baker, 1992: 206)

텍스트의 관계망은 텍스트를 결속시켜줄 뿐만 아니라 그 텍스에서 발생하는 개별적 어구의 의미를 규정한다. 사용되는 어구가 텍스트 내에 불러들여지기 전에 지니는 명제적인 의미를 십분 이해해야 함을 전제로 하는 얘기다. 관계망의 결속은 텍스트의 짜임새를 결정한다. 번역할 텍스트를 대했을 때 이 관계망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지만 어느 정도 원본 텍스트의 관계망에 의해 전달되는 전체 텍스트의 '결'을 어느 정도나마 옮겨주는 번역을 기대할 수 있음이다. 이런 점을 충분히 인식한 다음 다음에 텍스트에서 그것을 파악하지 않고 파악하고 나서 번역할 번역해야 하는데 경우 그렇지 않을 경우 , 그 텍스트가 텍스트의 정교하게 짜인 그물 구조가 흩어지게 되어 원본과는 거리가 먼 산만한 번역본이 되기 쉬울 것이다.

텍스트의 결속을 이루어주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에 주어진 본문에서는 어휘로 이루어지는 결속 lexical cohesion 중에서도 연어로 이루어지는 결속이 중요하다.

위의 본문에서 trek, mourn, frantically, busy, strenuously, rushing, venture 가 한 그룹을 이루고 inactive, sit, stare, nothing 이 다른 한 그룹을 이루어 서로 대조를 이룬다.

trek, venture, busy, frantically, strenuously, rushing 등은 함께 쓰이는 빈도수로 연어를 이루며 서로 쉽게 연상되는 어휘다. 이 어휘가 한 텍스트 안에서 서로 가까운 곳에서 쓰이며 서로 협조 관계를 이루면서 문맥을 결속시킨다. 다른 어휘 그룹도 마찬가지다. 번역을 하면서 이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한글에서도 이에 대응하여 서로 관계망을 이룰 수 있는 어구를 찾아 그 결속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하여 위의 초고를 수정해보도록 하겠다.

(01-13-09): trek 에 관해서는 1월4일 포스트에서 생각해보았으므로 생략하고 나머지 어휘 lexical item 를 생각해보겠다.

위에 열거한 일련의 어휘가 서로 체인을 이루며 모린 리프만의 근황에 관한 텍스트를 하나로 묶어준다. 이 어휘들이 서로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조명해주기 때문에 이 그물구조 lexical network 를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다음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 체인 혹은 그물이 끊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번역가가 할 일이다.

[She] mourns for her husband. 는 독립적인 예문으로 주어졌을 때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한다.'로 번역될 수 있고 또 이 번역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러나 위의 텍스트에 불러들여지면서 예로 든 다른 어휘와 체인 관계를 맺으면서 그 의미가 좀더 강화된다. 이렇게 맺은 관계 때문에 원본 텍스트의 전체를 통해 독자에게 연상되는 총체적인 이미지를 어느 정도 살려주려면 '슬퍼한다'라는 말 이외에 달리 쓸 수 있는 어휘가 무엇인지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슬퍼하다 -> 애통해하다' 로 바꾸어주어 좀더 긴밀한 관계망의 결속을 추구한다.

힘든 발걸음 -> 애통 -> 미친 듯 몰아침 -> 필사적 -> 급히 서두름

물론 힘든 발걸음은 모린 리프만이 아닌 저자의 심정을 나타내지만 '상실감으로 인한 깊은 슬픔'이라는 한 테마의 체인에 걸린다.

She makes herself frantically busy. 는 '정신 없이 바쁘게 산다.' '허둥지둥 frantically 눈코 뜰 새 없이 busy 자신을 몰아친다 makes.' 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후자를 택하려고도 했지만 원본의 관계망에 비추어 볼 때 '미친 듯'이 더 잘 맞는 것으로 보고 '미친 듯'으로 결정한다. 이 마지막 결정은 번역자의 언어에 대한 감각과 직관에 달린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이 문장에서 저자가 keeps 라고 하지 않고 makes 라고 한 점도 소홀히 할 수 없다. keep oneself busy 는 '바쁠 만치 할일을 충분히 찾아서 한다'는 의미인데 keep 의 자리에 make 를 써서 관용구를 깨뜨리는 것은 특별한 이유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make 를 통해서 '몰아친다'라는 의미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make 에는 '몰아친다' 라는 의미가 없다. 이 문장에서는 cause 정도의 의미로 쓰이지만 이 문장의 다른 어휘 lexical item 와 연동하면서 그런 강제적/인위적인 의미가 잠재해 있다가 드러나는 것이다. '몰아친다' 말고도 다른 표현을 한글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정도에서 타협을 본다.

strenuously 의 경우 초고에서 '힘겹게'로 옮겼다가 '정력적으로 -> 필사적으로' 의 순서로 바뀌었다. 역시 관계망을 고려한 선택이며 본문의 총체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유지해주기 위함이다.

주어진 텍스트에 사용된 어휘가 갖는 관계망과 이 관계망에 의해 이루지는 텍스트의 결속과 합일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번역의 대상이 되는 원본이라고 해서 모두 훌륭한 것은 아니며 어휘의 관계망이 산만한 글도 많다. 그럴 경우에는 번역자에게 또 다른 숙제가 안겨진다. 번역의 이 측면은 차후에 생각해볼 것이다. 연계성을 갖고 설득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그 이전에 생각해보아야 할 사항들이 있기 때문이다.

번역비평 (4)

그렇다면 여기서 자문해볼 점이 있다. 번역서만 가지고 원작의 문학적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번역서만 가지고 원작 고유의 문체를 비롯한 심미적인 면들을 비평할 수 있을까? 플롯과 플롯을 움직이는 내용은 - 혹은 내용과 내용을 움직이는 플롯은 -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한계일 것이다.

이 한계를 인정하고, 그래서 이것을 뛰어넘고자 한다면, 원서와 번역서를 비교하는 작업을 반드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비교 평가 작업에서 번역비평이 발생할 것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번역비평이 행해질 경우 최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일관성 있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객관성과 일관성은 이 일에 중요한 지침으로 언제나 작용할 것이다. 다음 포스트부터는 본론으로 들어가 이 기준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볼 것이다.

Sunday, January 11, 2009

번역비평 (3)

이제 [성경] 번역이 끝났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읽고 비판할 수 있다. 몇 페이지를 읽어도 읽어 나가는 데 걸림이 없다. 한때 큰 바위와 흙덩어리들이 있었던 곳을 걷기를 이제는 편평하게 갈아 놓은 판자 위를 걷듯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읽어 나간다. 사람들이 쉽게 걸어갈 수 있도록 바위와 흙덩어리를 치우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 했다. 밭을 깨끗이 고른 다음에 하는 쟁기질은 쉬운 법이다.


“밭을 깨끗이 고른 다음에 하는 쟁기질은 쉬운 법이다.” 루터의 말이다. 자신의 [성경] 번역(1530)을 가지고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비판한 비평가들에게 하던 말이다. 하지만 루터는 어쨌든 자신의 번역이 “비평의 대상이나 된다”는 사실에 만족해했다.

밭을 고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쟁기질을 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한다. 과문 탓인지 체계를 세워 쟁기질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밭을 고르는 사람이 체계적으로 밭을 고르는 일에 임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렇다는 말이다. 국외에 있으면서 인터넷에 의존한 리서치에 제한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이 블로그를 페이퍼로 삼아, 밭을 고르는 방법과 쟁기질하는 방법, 즉 번역과 번역 비평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체계를 얻기 위해 하는 생각이지만 그 과정은 산만한 수집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수집의 결과로 좋은 체계를 - 닫힌 체계가 아닌 열린 체계를 -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떤 사고의 체계든 출발점이 있고 이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일련의 가설이다. 가설의 세목은 스스로 진리라고 규명될 수 없는 더 이상 가를 수 없고, 즉 더 이상 파헤칠 수 없고 또 다른 세목에 또 같은 집합에 속하는 다른 세목에 의해서밖에 정의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원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번역에 관한 한 이 궁극적인 원칙의 집합을 찾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수집이 필요하고, 또 수집은 구미 언어학/번역학 이론가들의 연구 결실에서 따올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은, 서양 학문 그 차제가 월등하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다. 번역에 있어서 오랜 세월 축적되어온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 기본적인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실이 한글과 대비해서 맞지 않을 수도 있으며 수정과 폐기가 불가피할 수 있음이 불가피한 결실이 있을 것이라는 필연적인 조건으로 단서가 따라붙는다.

먼저 번역 비평의 현주소를 한번 생각해보고 그 다음은 비평의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그런 다음 그 한계도 생각해볼 것이다. 위에 언급한 수집의 출발점으로 왼쪽 사이드 바에 참고 문헌을 열거해놓았다. 앞으로 이 리스트는 더 늘어날지 모르지만 일단은 내가 가까이 하는 책으로부터 출발한다.

서구에서도 번역 비평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번역서를 갖고 하는 서평을 보면, 대부분 지나가는 말로 “술술 읽히게 번역되었다 translated fluently”, “원서를 읽는 것 같다 reads like an original”, “아주 잘된 번역이다 excellent translation”, “원서에 가깝게 번역되었다 sensitively translated” 등 애매한 촌평에 그칠 뿐이지 촌평을 뒷받침해주는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번역서에 대한 서평을 하는 사람이 번역서와 원서를 대조해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원서 해독 능력이 있어도 마찬가지다(Reiss, 2000). 그나마 원서의 언어가 영어나 일본어일 경우에는 그래도 좀 들여다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외의 언어일 경우는 원서와 대조해보는 경우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Saturday, January 10, 2009

책상 정리

이 블로그에서는 원래 의도했던 대로 번역에 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한다. 번역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은 Honey from the Weed 에서 할 것이다. 그리고 Eternity's Single Leaf 는 영시와 한국 시의 영역을 위한 블로그를 삼을 것이다.

Friday, January 9, 2009

아, 무정!

번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포스트는 이 블로그에서는 쓰지 않으려 하는데 작금의 어처구니없는 비극적인 사태가 나로 하여금 자꾸 한눈을 팔게 하여 또 방백을 올린다. 2년 전쯤인가, 이스라엘의 레바논 무차별 폭격 기사와 사진을 보고 느꼈던 불편함을 기록했었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도, 설교 강단에서 사랑과 공의와 긍휼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고 이에 화가 났었다. 현재 가자 지구에서 도저히 말이 않 되는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짐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미국의 기독교단과 대다수 일반인들을 가까이에서 보며 이 글이 생각났다. 살림살이가 너무 힘들어져서 마음의 여유들이 없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워지기 전에도 사람들의 반응이 별다를 바 없었던 점을 상기하면 반드시 경제 탓만도 아닌 듯하다. 정부와 미디어의 선전활동 progaganda 이 성공한 것일까?

리타니 강 북쪽을 향해
마을을 빠져나가던 양민들의 차량 행렬이
이스라엘군의 헬리콥터 폭격을 받았다
마을을 비우라는 그들의 경고에 따르던 양민들

11일간 계속된 남부 레바논
무차별 폭격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12살 먹은 아바스 샤이터가 마을을 빠져나가다
무차별 폭격에 할머니와 삼촌을 잃고
홀로 망연자실하는 모습은
그 큰 눈망울에 고여 있는 눈물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더욱더 힘들고 역겨운 것은
그들이 이슬람이라는 이유로
부시가 본어겐 크리스천이라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이스라엘을 두둔하고
무조건 부시 행정부를 두둔하는
기독교인들이다 - 나와 같은 기독교인들

순종이 제사에 앞서지 않던가
긍휼이 제사에 앞서지 않던가
공의가 순종 아니던가
공의가 제사에 앞서지 않던가

아바스 샤이터의 비극에 눈을 감고
갈채를 보내는 이들이여
아이의 눈물도 마시려오

Thursday, January 8, 2009

번역비평 (2)

번역 비평은 번역 이론과 실제 번역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다. 번역 비평은 재미있고 유익한 훈련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번역을 비평할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번역 비평은 번역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격 요건 중의 하나다. (1) 번역가로서의 역량을 쉽게 향상시킬 수 있고, (2) 모국어와 외국어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 경우에 따라서는 주제 지식도 - 증가시킬 수 있고, (3) 취사선택의 범위를 - [어떤 방법으로 번역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지에 대해서] - 보여주기 때문에 때문이다. 이것은 번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도움이 된다. - 피터 뉴마크 Peter Newmark

수집 assemblage 과정의 출발로 번역 비평 translation criticism 을 생각해볼 것이다. 이에 사용되는 자료로는 왼쪽 사이드 바에 밝혀 놓은 관련 저서들을 토대로 할 것이며 그 외의 자료가 불러들여질 때는 그때마다 언급을 할 것이다.

앞선 포스트에서 밝혔듯이 편견 없는 혹은 열린 수집을 - 즉 보잘 것 없지만 내가 세워 놓고 번역의 기준으로 삼았던 체계에 반대되는 내용이라도 포함시키며 - 백두 선생이 말하는 수집을 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수집 세목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그때 그때 사이드 바에 끄집어내어 추려 나가려 한다.

Wednesday, January 7, 2009

And Then There Was None.

처음에 그들은 유대인들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으로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노동조합원들을 잡으로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나를 잡으로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나를 위해서 말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마틴 니뮐러 목사 (1892-1984)
영어 번역시는 여기에.
Translated by Gene

나는 이 시의 밑에서 3째 줄 위에 다음을 보탰으면 한다:

이번에는 그들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잡으로 잡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
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Tuesday, January 6, 2009

Grieve Not.

Ode ('There was a Time')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u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한때 그렇게 빛나던 광휘光輝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 하여도,
푸른 초원의 찬란함과 꽃의 영광을
아무것도 돌려놓을 수 없다 하여도,
우리는 슬퍼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 있는 것에서 힘을 찾으리.
이제껏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원초적인 동정심에서,
인간의 고통에서 싹트는
위안이 되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믿음에서,
달관한 마음을 가져다주는 세월에서.

William Wordsworth
Translated by Gene

Optimism of the will!

We should have pessimism of the intellect and optimism of the will.
- Antonio Gramsci, Letters from Prison

지성의 회의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를 가져야 한다.
-> 회의적인 사고력과 낙관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 사고는 회의적으로 하되 의지는 낙관적이어야 한다.

촘스키가 즐겨 인용하는 그람시의 유명한 말이다. 나도 좋아하는 말이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운동을 하는 등 아무리 애를 써도 세상이 좀처럼 바뀌는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비평안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날카로운 비평안을 가질수록 회의적인 입장이 되기 쉽다. 그렇더라도 지성과 사고력을 키우고, 의지만은 희망을 잃지 말고 낙관적이어야 한다는 말일 게다. 그래, 오늘도 이 하루를 살아가는 내 의지에 낙관을 품어보자!

Monday, January 5, 2009

To Turn Again

재의 수요일 Ash-Wednesday

이 사람의 재능과 저 사람의 식견을 원하며
다시 선회旋回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바라지 않기 때문에
선회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애써 얻으려 애쓰지 않으니
일상의 지배적 힘이 사라진 것을
슬퍼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늙은 독수리가 왜 날개를 펴야 하는지?)
. . .

시간은 언제나 시간이며
공간은 언제나 공간이며 공간일 뿐
실제하는 것은 한 때
한 공간에만 실제할 뿐이기 때문에
나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기뻐하며
복 받은 얼굴을 포기하며
목소리를 포기한다.
. . .

그리고 우리에게 자비를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리고 나 자신과 지나치게 토론하고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설명하려 드는
이 문제들을 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 . .

T. S. Eliot
Translated by Gene

번역비평 (1) 수집과 정리, 그리고 체계

20여년 전 미국에 와서 접한 책 중에 Modes of Thought 가 있다. 한국에서는 유기체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화이트헤드 Alfred North Whitehead 의 책이다. 과거에 김용옥 교수가 백두白頭 선생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에 이 책을 접하고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거의 외우다시피 했었다. 비록 오랜 동안 이 책 자체는 잊고 살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알게 모르게 나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지배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나름 공부해온 번역 이론을 정리해보기로 하고 방법론에 대해 궁리하다가 이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번역 이론과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아무런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번역론과 관련된 모든 사고와 활동에 근간 ultimate principles 이 되기에 적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원문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번역을 단 다음 좀더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이 블로그에 올리는 번역은 항상 초고 상태로 올린다. 그런 뒤 다시 읽으며 눈에 띠는 것은 금을 긋고 수정했음을 표시한다.)
All systematic thought must start from presuppositions. (중략)

In all systematic thought, there is a tinge of pedantry. There is a putting aside of notions, of experiences, and of suggestions, with the prim excuse that of course we are not thinking of such things. System is important. It is necessary for the handling, for the utilization, and for the criticism of the thoughts which throng into our experience.

But before the work of systemization commences, there is a previous task - a very necessary task if we are to avoid the narrownesses inherent in all finite systems. (. . .) Philosophy can exclude nothing. Thus it should never start from systemization. Its primary stage can be termed assemblage. (중략)

In order to acquire learning, we must first shake ourselves free of it. We must grasp the topic in the rough, before we smooth it out and shape it. For example, the mentality of John Stuart Mill was limited by his peculiar education which gave him system before any enjoyment of the relevant experience. Thus his system were closed. We must be systematic; but we should keep our systems open. In other words, we should be sensitive to their limitations. There is always a vague beyond, waiting for penetration in respect to its detail.

모든 체계적인 사고는 가설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모든 체계적인 사고에는 지나치게 세목에 치중하는 현학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다. . . . 체계는 중요하다. 경험의 마당에 한꺼번에 밀려들어오는 모든 생각을 다루고 활용하고 평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나 체계화 작업에 앞서 먼저 해야 할 힘든 일이 있다. 한정된 체계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모든 유한한 체계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편협성을 피하고자 한다면 필히 해야 할 일이다. 철학에서는 철학은 아무것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철학은 체계화하는 데서 시작해서는 작업부터 해서는 안 된다. 철학의 제1차적인 단계는 수집(+ 정리)이라고 이름 지을 부를 수 있다. (중략)

배움을 얻으려면 먼저 그것을 [그 배움을 = 우리가 배워 알고 있던 것을] 벗어 던져야 한다. 주어지는 논제를 담론의 대상을 다듬고 정리하기 전에 먼저 그것을 먼저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한 예로, 존 스튜어트 밀의 사고방식은 그가 받은 유별난 독특한 교육에 의해 제한되었다 구속되었다. 이 유별난 교육으로 인해 그는 [교육 내용과] 관련된 경험을 [있는 그대로 = 날것으로] 받아들여 다루어보기 전에 체계부터 갖추게 되었다 갖추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체계는 닫힌 체계가 되었다. 우리는 체계적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 체계는 열린 체계여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체계의 한계에 민감해야 한다. 이 한계를 넘어선 곳에 우리의 의식에 [아직은] 분명히 잡히지 않은 그 무엇을 이루고 있는 세목[그 무엇을 이루는 개별적 정보 단위]이 항상 체계의 한계선을 침투해 들어오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다.

나는 번역을 하기 위해서 번역 이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론의 가치는 내가 하는 작업 자체, 작업 방법, 특정 방법의 선택에 대한 객관적인 반성(성찰/숙고)과 검증에 있다 하겠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반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론이 배제된 전적인 실용 교육만으로는 반성의 기능을 갖추기 힘든 것이다. 한편 번역의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중립적인 - 다소 중립적인 - 도구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도 이론일 것이다.

이 이론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백두 선생의 철학을 근간으로 해야겠다. 나도 모르게 잡혀 있는 나의 체계, 번역관을 허물고 편견 없는 수집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이 블로그에도 반영하기로 한다.(계속) 번역에 대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 형성되어 있는 체계를 허물고 수집을 하는 공간으로 이 블로그를 이용하기로 한다.

언어학, 번역 이론, 번역 비평으로 구분하여, 혹은 혼합하며, 수집하는 블로그가 될 것이다. 먼저는 결과를 바라보며 반성을 하기 위함이요, 그 다음은 반성의 결과를 딛고 나아가기 위함이다. 수집과 실험으로 형성되는 체계가 없으면 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고 믿는다. 열려 있기 위해서 공개적인 블로그는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몇 안 되겠지만 혹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아 주는 독자가 보정 역할을 해주며 닫힌 체계가 되지 않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번역 능력은 재능소관 ?

어제 발췌 번역해서 올린 라나 카스텔라노의 처방대로 하자면 번역가가 되는 길은 너무 멀다. 더욱이 한국처럼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열악한 현실에서는 번역가 지망생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너무 길다.

카스텔라노는 번역을 학문으로 공부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는다. 번역학이 가치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모나 베이커 Mona Baker 는 "제도적인 학문 formal academic training 으로 번역을 공부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는 전문 번역가들을 많이 본다"고 한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번역은 적성, 기질, 실습, 다방면에 걸친 주제 지식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라고 한다. 또 "번역 능력은 재능 gift 소관"이라는 것이다. 번역에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번역 이론 학습은 무의미하다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모든 예술 분야가 그렇듯, 이 분야에 타고난 재능이 있으면 좋으리라는 것, 그리고 타고난 재능에다 이론과 실습을 겸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Sunday, January 4, 2009

번역가의 커리어 피라미드

번역가라는 직업의 토대는 지식과 경험이다. 그 어느 직업보다 수습 기간이 길다. 3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번역가로서 쓸모를 갖추기 시작하고, 5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전성기가 시작된다.

이 직업을 피라미드식으로 생각하자면, 제1단계는 지식과 '인생 경험'의 획득을 통해 자신에게 투자하는 기간이다. 다음과 같은 번역가의 인생 시나리오를 제시해볼 수 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국적이 서로 다르다. 그들과 다른 언어를 읽고 쓰고 맞춤법을 배운다. 또 이 언어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가르치는 좋은 학교 교육을 받는다. 그런 다음 세상을 돌아다니며 친구를 사귀고 다양한 경험을 쌓고, 학교에 돌아가되 어학 학위가 아닌, 가령 기술이나 상업 부문의 학위를 받는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는 자신이 할 줄 아는 언어를 말하는 나라에서 일하되, 어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산업 혹은 상업 분야에서 일한다. 자국인과 결혼하지 않고 외국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키운다. 
그런 뒤 학교에 돌아가 번역 대학원 과정을 밟는다. 졸업 후 번역 회사에서 일하다가 프리랜스로 나선다. 이때쯤이면 40대가 될 텐데, 그러면 비로서 본격적으로 번역을 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Lanna Castellano 'Get rich - but slow', in C. Picken (ed.) ITI Conference 2: Translators and Interpreters Mean Business, London: Aslib.

(이상적인 구도이지만 서구에서는 실제로 그런 과정을 밟는 문학 번역가가 적지 않다. 그렇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그런 조건을 갖춘 이상적인 번역가는 국내에는 거의 없으니까. 번역이라는 일을 떠난 사회생활, 다양한 인생 경험과 문화 체험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시나리오로 삼으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주어진 조건 속에서 지속적으로 공부하며 열심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영미에서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업 '문학' 번역가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

번역가를 위한 라나 카스텔라노의 조언
  • Love language, especially your own. And keep studying it.
  • Learn to write well.
  • Learn about and study your passive language and the culture it comes from.
  • Only translate into your own language.
  • Select a specialist area of expertise, and study and be prepared to learn more about your specialist subject. Constantly.
  • Read: books, newspapers, blogs, magazines, adverts, style guides, cereal packets…
  • Listen: to TV, the radio, friends and family, strangers in the street, on the bus, in bars, in shops…
  • Attend workshops, seminars and conferences in your subject area – listen to the experts, absorb their language. Even their jargon – but try not to use it.
  • Keep up with current affairs.
  • Keep your IT skills up-to-date.
  • Practise and hone your skills – keep up with your training.
  • Listen to the words that you write (some writers and translators read their texts out loud to themselves). Languages each have their own rhythm. If your writing doesn’t “sound” right, try changing the word order, not just the words.
  • Use your spell-checker. Use it judiciously, but use it. Always.
  • Print out your translated text and read it on paper before delivering it to your client. Always. Especially if you use computer-assisted translation (CAT) software. Print it out.
  • Ask yourself if your translation makes sense. If it makes you stop, even for a second, and think “what does that really mean”?, then there’s something wrong.
  • Write clearly and concisely, using the appropriate sentence- and paragraph-length for your target language. Use simple vocabulary. You can convey even complex ideas using clear, straightforward language.
  • Inform your client of any mistakes, typos or ambiguous wording you find in the source text.
  • Find ways to add value for your clients.
  • Always keep your reader in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