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6, 2009

문화의 차이에 따른 연어 관계의 변화

간혹 어떤 번역자들은 때론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의미의 정확함 혹은 번역자 자신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선택해서 번역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사코 원작 텍스트에 있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재생해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느끼는 번역자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원작 텍스트:

KOLESTRAL-SUPER is ideal for all kinds of hair, especially for damaged, dry and brittle hair.

역逆번역 (위의 텍스트에 대한 아랍어 번역을 다시 영어로 옮김):
Kolestral-super is ideal for all kinds of hair, especially for the split-ends hair, harmed or damaged hair and also for hair which is dry, of weak structure or liable to breaking.

영어에서 hair 와 연어를 이루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dry, oily, damaged, permed, fine, flyaway, brittle 등등. 이들 연어들은 영어권 나라의 문화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말들이다. 대다수 영어권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가벼우며 잘 손상되는 축이다. 아랍어에서 ‘split-ends’, ‘dry’, ‘oily’, ‘coarse’, ‘smooth’ 등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 ‘hair’ 와 연어를 이룬다. 이 연어 관계는 아랍어권의 문화적인 현실을 반영한다. 아랍어에는 ‘damaged hair’‘brittle hair’ 와 유사한 구절이 없다. 그럼에도 위에 든 예문의 번역자는 원작 텍스트에 담겨 있는 의미의 모든 양상을 그대로 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원작 텍스트의 연어 구절들이 그대로 아랍어로 옮겨졌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은 번역을 했다. 아랍어 번역에서 표현된 부자연스러운 연어 구절과 길어진 설명은 아랍어 독자들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말들이다. 게다가 ‘damaged hair’‘brittle hair’ 같은 말들이 아랍의 일반인들에게 문제로서 비춰지는지도 의문이다. (Baker, 1992: 61)

그렇다면 예문의 광고 문안은 Kolestral-super is ideal for all kinds of hair, especially for the dry, split-ends hair. 정도로 번역되었으면 족하다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이것이 아랍인들에게 두발의 문제라고 인식되어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그렇다면 이 광고 문안이 설명하는 제품은 아예 처음부터 아랍인의 두발 미용과는 상관이 없든지, 있더라고 광고문안이 새로이 작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부터는 번역자의 소관을 넘어서는 문제일 것이다.

같은 예문을 한글로 번역한다면 콜레스트랄 수퍼는 모든 유형의 머리카락에 이상적이며 손상된 머리카락에 특히 좋습니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의 머리카락은 굵어서 파마로 인해서 손상되거나 기름기가 빠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잘 손상되지 않는다. 백인의 머리카락은 대개 건조하고 가늘고 가벼워서 풀풀 날리며 동양인이나 흑인의 머리카락보다 잘 손상되는 축에 속한다.

번역을 함에 있어서 문화적인 차이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언어의 표면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임할 경우, 번역어 독자에게 생경하고 잘 와닿지 않는 번역이 될 소지가 많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문이다. 언어 외적인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문화에 관한 지식, 다루어지는 주제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Wednesday, February 25, 2009

정확함과 자연스러움 사이의 갈등 (2)

앞선 포스트에 대한 예를 하나 살펴보겠다. 정확함보다는 자연스러움을 선택한 번역에 관한 것이다. 추가 설명을 보탬으로써 텍스트가 어수선하게 되거나 혹은 어색한 연어구를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할 만큼 의미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경우다.

원작 텍스트:
New Tradition offers a fascinating series of traditional patterns in miniature using rich jewel-like colours that glow against dark backgrounds.
(뉴 트러디션은 어두운 배경에서 빛을 발하는 선명한 보석 색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문양의 매혹적인 축소판 시리즈를 내어놓습니다.)

역逆번역 (위의 텍스트에 대한 아랍어 번역을 다시 영어로 옮김):
The ‘New Tradition’ collection presents a number of fascinating designs in a reduced size, in dazzling colours like the colours of gems, the glowing of which is enhanced by the dark backgrounds.
(뉴 트러디션 컬렉션은 다수의 매혹적인 디자인의 축소판을 보석 색 같은 눈부신 색상으로 선보입니다. 이 색상은 어두운 배경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Rich colours 는 선명하고 짙다. 아랍어의 연어 구절은 색의 농도보다는 밝은 정도를 나타낸다. (Baker, 1992: 57)

원작 텍스트에서 연어 관계를 이루는 구절에 대응하는 구절을 번역 텍스트에서 찾을 수 없을 때 내려야 하는 선택이다. 번역 텍스트가 쓸데없이 길어지거나 어수선하게 되더라도 설명하는 식의 번역을 해서 정확성에 치중할 것인지, 아니면 해당 구절의 의미를 충분히 살려주는 것이 문맥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으므로 번역어에 자연스러운 구절로 의미의 일부만 살려서 간결하게 처리해줄 것인지 판단해서 내릴 선택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내린 선택의 결과를 두고 부실 번역이나 오역 시비를 거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Monday, February 23, 2009

정확함과 자연스러움 사이의 갈등 (1)

(지리멸렬한 세태! 실패를 하더라도 좀더 폼나게 실패하기 위하여 오늘도 . . .
I will ever try. I may fail again. But I will fail better.)

번역자라면 누구든 번역을 할 때 원작 텍스트의 연어 관계를 깨지 않으면서 그 의미를 살리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 의미를 십분 살려 놓지는 못한다. 그 의미의 차이는 주어진 문맥 속에서 볼 때 아주 미세할 수도 있지만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영어의 ‘a good/bad law’ 는 보통 ‘a just/unjust law’ 로 번역된다. 이 의미의 차이가 중요하고 안 하고는, 주어진 텍스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이 ‘공정’에 초점을 두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또 한 예로 영어의 ‘hard drink’를 아랍어로 번역할 때 아랍어의 가장 가까운 말은 ‘alcoholic drinks’ 라는 연어를 이루는 말이다. 그런데 영어에서 ‘hard drink’는 위스키나 진과 같은 독한 술을 의미하며 맥주나 셰리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랍어에서 ‘alcoholic drinks’ 는 독한 술은 물론이고 맥주나 셰리 등 알코올을 함유하는 모든 음료를 가리킨다. 아랍어에서는 영어의 ‘hard drink’ 와 대등한 연어구連語句가 없다. 번역자가 ‘hard drink’를 전형적인 아랍어의 연어구로 옮기거나 혹은 그 의미를 분명히 살리기 위해서 연어 관계에 있지 않은 말을 사용하여 풀어서 번역한다든지 하는 결정은 원작 텍스트의 문맥에서 ‘hard drink’ 와 ‘soft drink’ 의 구분이 중요한지 아닌지 혹은 문맥과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여부에 달린 문제다.

어느 정도의 의미의 상실이나 보탬이 불가피한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언어마다 서로 구성 체계가 다른 까닭이다.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좀 달라질 경우, 이것을 받아들이고 말고의 여부는, 이 변화가 주어진 문맥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Baker, 1992: 56-57)

관련 언어에 대한 이해가 번역에 필수적인 전제 조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번역이론에 대한 개관과 이해도 균형 잡힌 번역을 위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도구다.

Saturday, February 21, 2009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 Samuel Beckett

Friday, February 20, 2009

그레고리 라밧사 (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번역자들에게 그가 한 말을 옮기지 말고, 그가 전달하고자 한 것을 옮기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서 이런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생각해볼 점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이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A drum! a drum! Macbeth doth come.

그런데 이 우렁찬 외침이 불어 번역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힘없이비실거린다.
Un tambour! un tambour! Macbeth vient.

번역자는 이런 부분에서는 이 부분에서 재량이나 창의성을 발휘했어야 했다. 셰익스피어가 전달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그 정신을 살려주도록 말이다.

보르헤스가 한 말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점도 또한 생각해볼 수 있다. 베를렌이 바이올린의 구슬픈 소리를 모방해서 “Les sanglots longs des violons de l'automne."라는 문장을 썼다. 이 문장의 의미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비음을 가진 말이 - 트롬본 소리라면 모를까 - 영어에는 없다. 그럼 번역에서 악기 자체를 트롬본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이 편이 번역의 본질에 더 합당한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Sunday, February 15, 2009

그레고리 라밧사 (2)

독자의 경험은 독서에 영향을 미친다. 독자로서의 번역자도 예외일 수 없다. 사람들마다 모두 사람들은 저마다 특별히 좋아하는 말이 있다. 경험이나 환경, 환경이 서로 다르고 혹은 교육을 통한 선호가 또 교육의 영향으로 선호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 많이 사용된 특정한 낱말이나 표현을 표현이 너무 많이 쓰여서 고쳐 써야 할 때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심지어는 어떤 분위기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내 자신의 경우, 월요일에 사용한 단어를 화요일에 다시 보고 마음에 안 들어 다른 단어로 바꾸었다가 수요일에 다시 원래 선택했던 단어로 되돌려놓기도 한다.

이 끊임없는 바꿈은 변경은 처녀귀신처럼 번역자들을 번역자에게 처녀귀신처럼 따라다닌다. 들러붙는다. 내 생각에 완성된 번역이란 없다. 일단 매듭지어 놓은 번역은 폐쇄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어 끊임없이 개고될 수 있다. 번역에 선택된 언어는 원저자의 언어만큼 확고하지 않은 까닭이다. 번역자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자는 자신이 선택한 번역어가 가장 좋은 선택인지 100%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번역해서 출간된 근사한 책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괴로운 심정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표지를 보면 마음이 흡족하지만 책을 펴서 읽어보면 첫 페이지부터 갈등이 일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번역하지 않고 저렇게 번역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갈등이다. 나는 내가 번역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지 않는다. 첫 페이지부터 그런 갈등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읽으면 너무 괴로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을지라도 내가 선택한 어휘나 표현에 대해 내 스스로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한 어휘나 표현 등이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느냐는 의문은 없어지지 않는다. 원작은 영원히 영광 속에 행진을 계속하지만 오래된 번역서는 자꾸 새롭게 번역해야 하는 번역되어야 할 필요가 바로 그런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Thursday, February 12, 2009

그레고리 라밧사 (1)

(그레고리 라밧사 Gregory Rabassa 의 이야기 중에서 생각해볼만한 부분들을 발췌해본다. 라밧사는 마르케즈의 Cien años de soledad (One Hundred Years of Solitude) 를 영역한 장본인으로 영어권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저명한 번역가다. ‘백년 동안의 고독’을 두고 마르케즈가 자신의 원작보다 마르케즈는 영어 번역 작품이 번역이 자신의 스페인어 원작보다 더 훌륭하다고 감탄했을 정도다. 라밧사는 컬럼비아 대학 Columbia University 과 뉴욕 시립대학 CUNY, Queens College 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그에 라밧사의 ‘백년 동안의 고독’ 번역과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라밧사는 1970년 ‘백년 동안의 고독’에 대한 번역료를 인세로 받지 않고 글자 수(매절)로 받았다. 영역본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판매량은 극히 저조했다. 그런데 그러나 마르케즈가 1982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고 이 책의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급증하자 급증했으며 이로 인해 약간 배가 아팠었다는 얘기를 그의 라밧사의 회고록에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는 글은 그의 회고록에서 발췌한 글이 아니다. 회고록 If This Be Treason (2005) 에 나오는 글이 아니고 The Craft of Translation (1989) 에 나오는 글이다. 시간이 날 때 여기저기 흥미로운 부분만 조금씩 이 자리에 옮겨보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이 세상에 서로 똑같은 것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희망사항이고 희망사항일 뿐이고 어렸을 때부터 받아온 산수교육 탓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엄격하게 엄밀하게 비교하고 따져보면 모든 것은, 생물이든 아니든 간에, 서로 아주 많이 닮았을지라도 개별적으로 철저하게 독특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알파벳의 첫 글자를 배우고 덧셈을 배우기 시작했고, 셈하는 것, 즉 2 +2 = 4 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고부터 줄곧 그와 같은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이 셈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한다. 2 + 2에서 두 번째 2가 첫 번째 2보다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새롭기 때문에 2 + 2 = 4 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언어를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한 언어에 속한 단어가 다른 언어에서 등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실제로 요즘의 수학자들은 그들의 선배들보다 좀더 신중하고 조심스런 태도를 취한다. ‘동일하다’라는 말 대신에 ‘접근한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빈번해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번역은 원작과 동일할 수 없고, 다만 원작에 접근할 뿐이다. 그리고 정확성과 관련하여, 번역의 우수성은 그 번역이 원작에 얼마나 가깝게 접근하고 있느냐에 의해 평가될 수밖에 없다.

Sunday, February 8,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5)

원저자가 이미 저세상 사람일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난센스 같은 글을 썼을 때는 번역 출판사의 질문들을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뉴욕의 한 출판사와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의 시선詩選을 번역했던 적이 있다. 그 출판사의 편집실에서 당황해 하며 내게 코멘트를 보내왔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요.’
‘그래요 말이 안 되죠. 모르겐슈타인은 난센스의 시인이었어요. 루이스 캐롤이나 에드워드 리어를 생각해보세요.’

나는 싱글 스페이스로 장장 5페이지에 걸친 편지로 - 번역된 전체 시보다 훨씬 더 길게 -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여전히 걱정하는 질문을 해왔다.

‘영어에는 이런 단어가 없는데요.’
‘맞아요, 없죠. 하지만 독어 원작의 이 단어는 독어에도 없는 단어예요.’

나는 모르겐슈타인에게 지원 사격을 청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했을 것이다. (모르겐슈타인은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매우 유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저세상 사람이니 그가 내 번역을 승인하겠지 하고 바랄밖에.

Friday, February 6, 2009

한국문학 번역의 과제들

이 블로그에서 신문 기사나 남의 글은 스크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이 기사만큼은 나중에 잊지 않고 다시 보기 위해 여기에 담아둠.

안선재(Brother Anthony) | 한국문학 번역가, 서강대 명예교수

한국인들은 흔히 한국문학이 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 출간된 작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1년 이후에 70편이 넘는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작품 수는 분명히 그보다 더 많다. 자주 듣는 또다른 말은, 한국문학의 번역은 형편없어서 노벨문학상 같은 것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첫번째 답변은, 최근에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있다는 것이다. 번역과 성공적인 마케팅은 노벨상을 타는 선행조건이 아니다. 두번째 답변은 지난 10년간 내가 봐온 한국문학 번역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충분히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상당히 괜찮다는 것이다. 세번째 답변은 노벨상 수여기관인 스웨덴 왕립아카데미 회원들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씌어진 문학작품을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명백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그들이 내린 판단은 대부분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동상이몽

그러나 한국문학의 번역과 홍보가 당면한 문제는 분명히 있다. 첫째, 번역될 작품을 선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의 문화, 정부 관계자들은 대개 이미지 선전으로써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려는 총제적인 캠페인의 일환으로, 널리 상찬되고 정평있는 '유명한' 한국작가들의 번역을 추진하려고 한다. 한국문학사를 가르치는 학계의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판단하기에 근대 한국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작품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늘날 해외의 상업출판업자들의 관심은 단 한가지에 집중된다. 즉 그들은 재정적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자기들의 위신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팔리는 작품을 출판하려고 한다. 한국측의 '문헌적 정보' 프로젝트와 '성공・수익'에 대한 외국 출판업자들의 요구 사이에는 직접적인 갈등이 있는데, 이 갈등은 런던이나 빠리, 뉴델리 등지에서 현재 어떤 종류의 문학작품이 잘 팔리는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문학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므로 전세계가 그 한국 작품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일은 없다. 최근에 나는 한 유명한 한국작가가 너무 많은 젊은 한국작가들이 1인칭 화자를 도입해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사실적인’ 스타일로 창작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세계문학으로 진출하려면 국제감각부터 익혀야

그의 비판은 (나는 그 논평의 전문을 보지 못했지만) 많은 한국문학 작품에서 서술자의 복합성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많은 한국 소설은 시작에서 출발해 간혹 회상이 섞여 들어가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어색한 결말로 끝맺는다. 외국의 성공적인 소설은 이렇게 창작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문학을 '세계화'하기를 바랄 때 한국이 당면한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오늘날 세계의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국 작가들과 독자에게 교육하는 것이다. 현재 번역과 출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 문학작품을 바깥에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동시대 외국의 탁월한 작가들을 한국독자에게 알리는 일이다. 전해지는 근래의 일본소설의 성공담은 그 점을 확인해준다.

많은 기성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을 현대인의 시청각매체에 대한 집착 탓으로 손쉽게 돌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독자들이 뭔가 더 나은, 진정으로 새롭고 즐거운, (최소한 때때로) 생각을 자극하는 그런 작품을 원한다는 사실의 징표이기도 하다. 양질의 현대 세계문학의 번역을 한국의 출판인들이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에 해가 되는 일이다.

외국독자들이 말하는 한국의 시와 소설

오늘날 세계에서 시는 대부분 잘 팔리지 않는다. 상을 타고 비평의 주목을 받으면서 수익을 내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시가 지난 20년간 한국소설보다 영어로 그렇게나 많이 출간되었는가? 나 자신만 해도 시집을 거의 20여권을 번역했지만 번역한 소설은 3권에 불과하다.

이 물음에 대한 한가지 답변은, 한국 시는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고 활기차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 시인들은 번역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특정한 한국적 삶의 경험에 대해 쓴다. 그들의 시는 살아 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독특하게 인간적이다. 물론 그 시적 효과를 위해 주로 한국어의 특징에 의존하는 시인들은 번역으로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외국독자들에게 어떤 한국 시들의 영향은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으레 이렇게 묻는다. "작품이 왜 이렇게 우울한가?" 시는 자주 고통스러운 상황에 복합적이며 개인적인 반응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목소리를 듣게 한다. 물론 소설은 시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한국 소설가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아한 문체, 다양한 서술 리듬, 해석의 모호함, 여러 서술자들의 목소리, 글쓰기 전략에서의 복합성 등은 모두 시로서의 소설이 갖는 근본적인 특성들인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체면치레하지 말고 치열하게 비판하라

물론 어느 면에서는 한국작가들이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효과적인 대화가 성숙되지 않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어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탓도 있다. 서평 형식으로 (때로는 맹렬하게) 표현되는 문학비평은 국제적인 문학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모든 작가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자기에게 너그러운 것이다. 사려깊고 도전적인 비평 없이 어떤 작가가 기량을 연마하고 약점을 고치고 성숙한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할 수 있겠는가? '체면'과 '명성'이 핵심 고려사항인 한국 같은 문화에서 정직한 비평은 자주 거부된다. 이건 큰일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창작되는 작품과의(반드시 북미나 유럽의 작품일 필요는 없다)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이 다시 태어나려면, 문단이나 학계의 '고참'들이 젊은 작가에 대해 후견인 노릇을 하고 평가하는 여전히 강력한 위계구조는 철폐하고,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자유를 찾아야만 한다. 그런 새로운 한국문학이라면 번역될 때 찬사를 받을 가능성이 휠씬 크다. 또한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의 핵심적인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7.5.15 ⓒ 안선재 2007

Thursday, February 5,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4)

한 번역자가 말했듯이 구글은 ‘번역자의 친구’다. 구글을 통해서 거의 언제나 번역자의 까치둥지 같은 머리가 필요로 하는 진기한 자료의 조각들을 찾아낼 수 있다. 나는 구글 검색을 통해서 카렌 두베의 Dies ist kein Leibeslied (This Is Not A Love Song)에 나오는 많은 밴드들과 그들의 노래 가사들을 캐내기도 했다.

카렌은 친절하게도 자신의 소설을 번역할 때 의문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카렌을 귀찮게 하지 않고 그럭저럭 이 소설에 나오는 관련 참고 자료들을 찾아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번역자마다 다른 방법을 취한다. 어떤 번역자들은 먼저 책을 통독하며 저자에게 질문할 사항을 추려낸다. 물론 이것도 한 가지 방법이지만 저자가 생존해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몇 년 전에 내가 번역한 E.T.A. 호프만의 Kater Murr (Tomcat Murr)는 몇 군데 주석註釋을 달 필요가 있었다. 펭귄 클래식의 우수한 편집자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호프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아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연구서도 몇 권 찾아보았지만 모두 그 부분들은 아예 무시되어 있었다. 저자들은 대개의 경우 기꺼이 질문에 응답한다. 게다가 간혹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있다.

우베 팀의 Am Beispiel meines Bruders 에 관한 얘기다. 이 책은 미국에서 In My Brother's Shadow 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 저자가 만든 새로운 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었다. 오래 전에 죽은 형에 대한 꿈을 기억하고 얘기할 때 나온 Doldenhilfe 라는 말인데, 아무 의미 없는 일종의 혼합어로서 신조어 neologism 였다. 이 책은 팀 박사 가족에 대한 회고록인데 이것을 번역한 번역자들이 모두 그 말이 무슨 단어인지 문의를 해왔다고 한다. 만일 이와 같은 의문스러운 점이 있음에도 저자에게 묻지 않으면 결과는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나는 Band-Aid 에서 유추하여 그 (자선사업을 의미하는) 말을 ‘Floweraid’로 번역했다. 전문적인 식물학 용어인 ‘umbel’은 식물학자가 아닌 독자에게는 좀 어려운 단어이기 때문에 flower 로 대신했다. [Dolde = umbel (산형繖形 화서). Hilfe = help.]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 내가 아는 여러 번역자들이 그렇듯이 - 문제점들이 있거나 외연을 추적해야 할 때, 저자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것은 내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Tuesday, February 3,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3)

nbg (new books in german) 라고 하는 1년에 2회 발행되는 간행물이 있다. 이름이 가리키듯이 이 잡지는 최근에 출간되었거나 조만간 출간할 예정인 독어권(독일, 오스트리라, 스위스) 작품들을 영어권의 출판사들에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매회 원작 출판사 중에 한둘은 편집 위원회에 초청된다. 나도 편집 위원 중 한 사람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아이히보른 출판사가 출간한 ‘레건로만 Regenroman’ 은 nbg 에 제출된 타이틀 중 하나였다. 그런데 nbg 가 의뢰한 평가자들 reader 중에 ‘레건로만’을 맡은 평가자는 이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nbg 는 매회 출판사들이 제출하는 100권 가량의 책들 중에서 20여 권만을 선정해서 이들에 대한 서평을 싣는다. 그런데 ‘레건로만’은 선정되지 않았다. 편집 위원회는 상당수의 타이틀에 대해서 평가자들의 의견을 따른다. 아무도 그 모든 책들을 전부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그때 객원 편집위원이었던 로즈메리 데이빗든이 평가자의 ‘레건로만’ 요약을 읽고 흥미가 발동해서 ‘레건로만’을 자신이 직접 읽어보고는 영역본에 대한 판권을 샀다.

나는 ‘레건로만’을 읽기 시작하면서 과연 이 책이 nbg 에 포함되었어야 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번역에 착수해서 재미있게 번역하며 어느 정도 진행했을 때 이 책의 스타일의 독창성과 장점을 더욱 깊이 확신하게 되었다. 번역이라는 정밀 작업은 질산으로 하는 시금試金 작업이다. nbg 의 평가자는 그런 연장된 작품 요소들을 식욕이상증진 bulimia 의 에피소드로 보지 못했고 화염 총을 사용한 살인 장면을 문맥상에서 보지 못했다. 문맥상으로 볼 때 그런 구성 요소들은 결코 충격이나 공포를 유발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소설의 구성에 적합한 것임을.

Monday, February 2,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2)

번역자 협회가 속해 있는 작가 협회의 정기 간행물인 “작가 The Author”誌 최신호에 좋은 기사가 났다. 이 기사에서 에릭 디킨스는 영역 작품의 상대적 기근을 개탄한다. 그는 또한 많은 문학 번역자들이 전문적인 시각을 가지고, 신뢰할 만한 판단을 스스로 해서 번역할 만한 책을 출판사에 제안할 것을 권한다. 내 자신의 경험으로는 대개 적어도 절반 정도는 그런 식으로 일이 성사된다. 어떤 책에 대해서 세심할 정도로 솔직한 평가를 해주는 것은 원고/도서 평가자 reader 로서의 번역자가 해야 할 일이다 - 출판사들은 대개 원작을 읽어낼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외국어로 된 책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콜리지 Samuel Coleridge 가 어디에선가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이 외국어 서적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은근한 만족감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번역자가 출판사를 위해서 대신해서 책을 읽을 경우, 사정은 다르다. 실제로 자본을 투입해야 하는 출판사에 책을 추천함에 있어서 극도로 신중해야 하는 것은 평가자 reader 의 임무인 까닭이다. 한편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한 번역 제의를 출판사로부터 받을 때는 먼저 그 책을 읽어본 다음에 그 일을 맡을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번역자들은 실제 번역 과정이 그 책에 대한 어떤 시험대가 되는지 잘 안다. 어떤 책을 읽고 그것을 번역 출간하도록 권해서 출판사가 그 책을 번역하기로 결정했을 경우, 번역자는 적어도 번역이 끝날 때쯤이면 자신이 옳은 평가를 내렸는지 아닌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Sunday, February 1, 2009

안시아 벨의 번역 이야기 (1)

영국의 저명한 번역가 안시아 벨(b. 1936)의 번역 이야기에서 흥미롭거나 요긴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우리말로 옮긴다. 시간 나는 대로 매일 조금씩 번역해서 올릴 것이다.

Regenroman 의 영역본 제목은 Rain 이다. 두운頭韻이나 분위기 면에서 두운을 보나 소설의 분위기를 보나, Rain 보다 더 독어 원작의 제목과 어울릴 제목이 없었겠지만, 나는 아직도 원작의 제목이 좀 약해진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분위기가 - 비유적인 분위기뿐만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분위기가 - 큰 비중을 차지한다. 각 장의 제목은 일기예보에서 쓰는 말이다. 내가 출판사에 제안한 제목은 A Rainy Story 이다. 하지만 나는 내게 제목을 생각해내는 특별한 재주가 없음을 잘 안다. 그뿐 아니라 기실 나는 내가 번역할 책의 원제가 고유명사일 경우, 나는 안도의 숨을 때는 안도의 숨마저 쉰다. W.G. 제발드의 “아우슈털리츠 Austerlitz”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 . . 제목이 고유명사일 경우에는 번역자로서나 번역서 출판사로서나 별문제가 없다.

원제가 고유명사가 아니고 노래의 제목인, 카렌 두베 Karen Duve Dies ist kein Leibeslied (This Is Not A Love Song)의 경우에도 별문제가 없다. 나는 이 책을 2004년 5월에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강의 초고 작업만 해놓았을 해놓은 시점에서 어느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세미나의 참석자들은 내가 그 책을 번역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책의 내용에 나오는 1970년대의 독일 팝송 가사 중 특정 부분들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 내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대강의 초고만을 마쳤기 때문에 정확한 똑 부러진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번역자들은 저마다 번역자마다 제각기 모두 선호하는 작업 방식이 있다. 내 방식은 먼저, 최대한 빨리, 대충 초고를 끝내는 것이다. 그런 다음 1차 개고와 2차 개고는 좀더 천천히 진행한다. 내가 이런 방식을 택하는 부분적인 이유는, 초고를 준비하며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의문 사항이나 문제점들은 문제점들에 대한 해답이 나중 부분에서 나중에 그 해답이 주어지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번역자들은, 흡족하지 않은 번역을 하고 지나간다는 초조한 생각에 조바심을 내고, 초고부터 모든 것을 다듬어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내가 아는 어떤 번역자는 번역할 책을 번역에 앞서 한번도 읽어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윌리스 반스토운 Willis Barnstone 이 그의 책 “번역의 시학 The Poetics of Translation”에서 규정한 경험을 십분 만끽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번역은 특정한 종류의 독서, 즉 원작 텍스트에 대한 “정밀 독서”가 되기 마련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 번역자가 번역할 책을 먼저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번역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지, 난 정말이지 알 수가 없다.

번역자는, 번역할 책의 장단점, 그리고 그 책이 출판사의 출간 목록에 끼어서 어울리는지 등에 관해 출판사에 소견을 말해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번역할 책을 번역하기 전에 먼저 읽어보았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많은 경우에 그러하다. 학자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 나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소설을 특별히 선호하지만 - 여러 분야의 책을 번역하는 현역 번역자로서 하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