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8, 2009

번역비평 (6) 번역본 평가

번역할 원본을 대할 때 명확하지 않은 텍스트를 다뤄야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사상思想이 텍스트로 옮겨지는 과정도 일종의 번역이다. 머릿속에 무형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이 시각적인 기호로 바뀌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 일정 방식의 코드로 짜여진 사상을 다른 방식의 코드, 즉 시각적인 기호로 변환해주기 때문에 일종의 번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번역자다. 일상생활에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일상의 번역자들 가운데 활자로 변환해놓은 자신의 코드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소수의 무리가 있는데 이들을 작가라는 통칭으로 묶어서 분리한다. 이들이 코드화해놓은 활자를 읽는 독자들은 작가들의 사상, 코드화되기 전의 사상을 알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한다. 돈을 써가면서까지 독자 스스로 짊어지는 해독자로서의 의무다. 시간과 돈을 써가며 자원하면서도 해독자로서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고 뒷짐 지고 딴 짓 하는 독자도 있다. 아, 그러나 이 자리는 '생태학'을 논하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한눈팔지 말고 원래 하려던 얘기를 향해 나아가자.

작가가 시각적인 기호, 즉 활자로 변환해놓은 코드를 다른 활자로 바꾸어주는 일을 스스로 떠맡는 무리가 있다. 번역자 혹은 번역가로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뜻은 가상하지만 한편으론 가련하기도 하다. 영미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간혹 그냥 번역가라고 하지 않고 번역작가 translator writer 라고도 한다. (번역 얘기를 해가면서 영어문법이 필연적으로 다루어지겠지만, 두 명사 중에 앞의 명사는 뒤의 명사를 수식하는 형용사 기능을 한다. 그러니까, 번역가이자 작가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번역작가라고 하는지는 이 글을 통해서, 아니 내 코드화의 결과를 통해서, 차차 드러나리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번역자라는 명칭을 선택해서 쓰려고 한다. 원저자에 대하여 번역자라고 하는 것이 더 정합성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 즉 원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코드화한 활자를 다른 활자로 바꾸어주는 고된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번역자가 수행해야 할 의무는 이 코드를 해독하는 일이다. 번역자는 이 코드를 해독해서 원저자가 품었던 찬란한 신세계를 자신의 머릿속에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코드의 해독을 보다 친밀한 두 글자로 바꾸면? 독해. 그러나 번역자는 그냥 독해가 아니고 치열한 정밀 독해 작업조에 편입된다. 이 작업조에 편입되기를 거부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폐해는 실로 가볍지 않은 것이다. 다른 데 가서 딴 짓 하다가는 반역자가 되기 십상이다.

해독이 완전히 이루어진다고 해서 천사의 아리아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원저자가 거쳤던 코드화의 천로역정이 아직 남아 있는 까닭이다. 이때—translator writer 를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고 앞서 암시했지만—요구되는 것이 원저자가 발휘한 코드화의 실력을 모방하여 동원하는 것이다. 원작의 시각적인 기호는 나무랄 데 없이 잘 해독해서 머릿속에 원저자가 본 신대륙이 그대로 펼쳐지지만 다른 시각적인 기호로 코드화하지 못하는 사람은 원작의 언어가 모국어이면서 독해력은 뛰어나지만 외국어, 그 '다른 시각적인 기호'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반쪽인 것이다. 나머지 반쪽은 새로운 코드화 작업이다.

이 새로운 코드화 작업의 산물, 번역본을 읽을 때—운본과 원본과 대조하지 않고 번역본만 읽을 때—흔히 보이는 불명확한 부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한 초석으로 서론이 길었다. 다음 포스트에는 바로 이 점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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