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11, 2009

번역비평 (3)

이제 [성경] 번역이 끝났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읽고 비판할 수 있다. 몇 페이지를 읽어도 읽어 나가는 데 걸림이 없다. 한때 큰 바위와 흙덩어리들이 있었던 곳을 걷기를 이제는 편평하게 갈아 놓은 판자 위를 걷듯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읽어 나간다. 사람들이 쉽게 걸어갈 수 있도록 바위와 흙덩어리를 치우기 위해 피땀을 흘려야 했다. 밭을 깨끗이 고른 다음에 하는 쟁기질은 쉬운 법이다.


“밭을 깨끗이 고른 다음에 하는 쟁기질은 쉬운 법이다.” 루터의 말이다. 자신의 [성경] 번역(1530)을 가지고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비판한 비평가들에게 하던 말이다. 하지만 루터는 어쨌든 자신의 번역이 “비평의 대상이나 된다”는 사실에 만족해했다.

밭을 고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쟁기질을 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한다. 과문 탓인지 체계를 세워 쟁기질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밭을 고르는 사람이 체계적으로 밭을 고르는 일에 임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렇다는 말이다. 국외에 있으면서 인터넷에 의존한 리서치에 제한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이 블로그를 페이퍼로 삼아, 밭을 고르는 방법과 쟁기질하는 방법, 즉 번역과 번역 비평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체계를 얻기 위해 하는 생각이지만 그 과정은 산만한 수집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수집의 결과로 좋은 체계를 - 닫힌 체계가 아닌 열린 체계를 -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떤 사고의 체계든 출발점이 있고 이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일련의 가설이다. 가설의 세목은 스스로 진리라고 규명될 수 없는 더 이상 가를 수 없고, 즉 더 이상 파헤칠 수 없고 또 다른 세목에 또 같은 집합에 속하는 다른 세목에 의해서밖에 정의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원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번역에 관한 한 이 궁극적인 원칙의 집합을 찾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수집이 필요하고, 또 수집은 구미 언어학/번역학 이론가들의 연구 결실에서 따올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은, 서양 학문 그 차제가 월등하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다. 번역에 있어서 오랜 세월 축적되어온 결실이라는 점에서 그 기본적인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결실이 한글과 대비해서 맞지 않을 수도 있으며 수정과 폐기가 불가피할 수 있음이 불가피한 결실이 있을 것이라는 필연적인 조건으로 단서가 따라붙는다.

먼저 번역 비평의 현주소를 한번 생각해보고 그 다음은 비평의 준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것이다. 그런 다음 그 한계도 생각해볼 것이다. 위에 언급한 수집의 출발점으로 왼쪽 사이드 바에 참고 문헌을 열거해놓았다. 앞으로 이 리스트는 더 늘어날지 모르지만 일단은 내가 가까이 하는 책으로부터 출발한다.

서구에서도 번역 비평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번역서를 갖고 하는 서평을 보면, 대부분 지나가는 말로 “술술 읽히게 번역되었다 translated fluently”, “원서를 읽는 것 같다 reads like an original”, “아주 잘된 번역이다 excellent translation”, “원서에 가깝게 번역되었다 sensitively translated” 등 애매한 촌평에 그칠 뿐이지 촌평을 뒷받침해주는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번역서에 대한 서평을 하는 사람이 번역서와 원서를 대조해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원서 해독 능력이 있어도 마찬가지다(Reiss, 2000). 그나마 원서의 언어가 영어나 일본어일 경우에는 그래도 좀 들여다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외의 언어일 경우는 원서와 대조해보는 경우가 거의 전무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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